50대 중반의 한 여성독자가 동창 모임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모임 장소인 볼룸으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를 탔는 데 엘리베이터 안의 사람들이 모두 학교 때 본 친구 엄마들과 비슷했어요.
그래서 ‘동창 엄마들도 LA에 사는가 보다’고 무심코 생각했지요. 그런데 볼룸에 가보니 그 사람들이 모두 우리 동창들이었어요”
동창으로 확인되는 순간, 친구의 엄마를 연상시키던 둥둥한 몸매의 중년여성은 사라지고 그 위로 여리고 싱그러운 모습이 떠오르면서 탄성은 터져 나온다.
“너 어쩜 하나도 안 늙었구나. 옛날 그대로야!”
12월 들어서며 각 학교 동창회 망년 파티로 한인타운의 호텔들이 붐빈다. 동창회는 많고 대형 연회장으로 쓸만한 호텔은 제한되다 보니 망년회를 아예 포기하고 신년 모임을 갖는 동창회들도 상당수이다.
한국의 각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가 저마다 동창회를 조직하고 있으니 그 숫자가 엄청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왜 이렇게 동창 모임에 열심일까. 얼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단지 동창이라는 사실 하나로 순식간에 친해지는 ‘이상한’힘, 그것이 이유일 텐데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자아 형성 시기를 같이 보낸 경험, 그리고 개인보다는 집단을 통해 정체성을 확인하는 우리의 정서가 그 힘의 바탕으로 꼽힌다. 나이 60이 되어서도 여전히 어느 고등학교 출신인지를 따지고, 동창이라고 반가워하는 부자연스런 현상에 대해 한 정신과 의사는 이런 설명을 했다.
“중고등학교 6년은 성인이 된 후의 6년과 다릅니다. 자아가 형성되는 아주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이지요”
성장기의 친구들, 즉 동창은 자아와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근원적인 친밀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같은 콩깍지의 콩알들이 나누는 소속감, 유대감, 그리고 동질감이다.
아울러 개인은 드러나지 않고 집단을 우선 시하는 우리의 전통이 동창회를 번창하게 만드는 토양이 될 것이다. ‘나’ 보다는 어느 집안, 어느 학교, 어느 지방 출신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 우리는 길들여져 왔다.
어려서부터 ‘개인’으로 자라도록 교육받는 미국인들은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다.
50대 후반의 한 친지가 한국에 다녀온 이야기를 미국 친구들에게 했을 때였다.
“한국에서 고교 동창들을 만나고 왔다고 하니까 미국 친구들이 놀라더군요. 고등학교에 다닌 것이 언제 적 일인데 아직도 동창들을 만나느냐는 것이지요”
그렇게 만난 동창들과 한순간에 가까워지게 만드는 직접적인 매체는 아무래도 ‘말’이다. 40대 초반인 한 대학후배는 ‘반말’의 효과를 강조한다. 초등학교 동창들과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있는 그는 동창들에게 느끼는 친밀감이 자신이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라고 했다.
“4학년 때 그 학교로 전학을 갔기 때문에 사실은 짠한 기억도, 그 친구들과 공유하는 추억도 없어요. 그런데도 ‘동창이다’ 하니까 반말이 터져 나오면서 급속도로 가까워지더군요”
생애 어느 지점을 같이 걸었던 길동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동창’을 설명할 수는 없다. ‘어느 지점’을 같이 걸었느냐가 중요하다.
그 곳은 우리가 어른이 되면서 하나씩 껴입은 옷들, 체면과 격식의 옷들, 혹은 이해관계에 따른 가면들을 아직 입고 걸치기 전, 벌거숭이로 같이 어울렸던 지점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다.
직장 동료들과 10여년 매일 얼굴을 맞대고 일해도 어쩌다 한번 얼굴 보는 어릴 적 친구 같은 친밀감이 형성되지 않는 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해의 껍질들 때문이다.
벌거숭이로 나를 드러내도 부끄럽지 않던 곳, 그래서 생명력이 넘치던 곳 - 그 곳은 우리의 정신적 ‘에덴동산’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동창모임에 가는 이유는 우리 생애의 봄날, 그 싱싱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권정희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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