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직했던 월급봉투가 가뿐하게 비어버린 느낌 - 매년 이맘때면 찾아드는 허탈감이다. 365일이라는 두툼한 시간의 봉급을 받아들고 기대감에 들떴던 것이 불과 얼마 전 같은데, 봉투에 구멍이라도 난 것일까, 손에 남은 건 동전 몇 개 딸랑거리는 빈 봉투뿐이다. 이제 2003년이라는 봉투 자체를 내 버릴 때가 되었다.
시간은 답답할 정도로 꾸물대며 다가와서는 독수리처럼 쏜살같이 날아가 버린다. 하루를 보내기는 그렇게도 고단하며 지루하고,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단 하루를 건너뛸 수가 없는 것이 시간인데 지나고 보면 한두 달, 혹은 1년이 순식간이어서 도둑을 맞은 느낌이다.
시간이 다가오는 속도와 지나가 버리는 속도 사이의 엄청난 괴리 때문에 생기는 현상일 것이다. 매년 연말이면 찾아드는 허탈감에서 해방되려면 다가올 때와 지나갈 때가 전혀 딴 모습인 시간의 본질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장 건강한 상태는 몸이 느껴지지 않는 상태라고 한다. 몸이 그저 있을 뿐 자각되지 않는 상태이다. 어깨가 쑤실 때 비로소 어깨를 느끼고, 평소 있는 줄도 모르고 살던 발가락에 작은 티눈이라도 생기면 그때부터 발가락은 매 순간 느껴진다.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동행하는 시간도 의식되지 않는 상태가 가장 이상적인 상태이다. 삶은 결국 시간이고 시간이 고통스럽게 느껴지면 삶은 그만큼 고통스러운 것이다. 반면 즐거운 일에 몰입하면 10시간이 10분처럼 지나가 버려 시간이 전혀 의식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시간의 상대성이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처음 발표했을 때 그 새로운 이론을 이해시키기 위해 이런 설명을 했다고 한다.
“한 남성이 아름다운 여성과 같이 있다면 두 시간이 2분처럼 느껴지겠지요. 하지만 그가 뜨거운 화덕 위에 앉아 있다면 2분이 두 시간처럼 느껴질 겁니다. 그게 바로 상대성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 이치이다. 그 보다 더 이상적인 시간은 몰아의 경지에서 보내는 시간이다. 시간을 잘게 세분해 매 순간을 다 감지하는 신비로운 경험이다.
무술의 고수들이나 운동 선수들이 때로 그런 초월적 경험을 하는 데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테니스 선수, 지미 코너스의 말이다.
“네트로 넘어오는 공이 아주 커 보이고, 느리게 천천히 공중에 떠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면 공을 언제, 어떻게, 어디로 칠까를 결정할 시간이 충분하지요”
시간이 완전히 정지된 듯 매 순간을 느끼지만 시간의 흐름 자체는 전혀 지루하지 않은 경험- 현재의 시간을 사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이다.
보통 사람들은 사랑에 빠졌을 때 비슷한 경험을 한다. 연인과 같이 있으면 시간은 꿈결같이 지나가 버리지만 그러면서도 매 순간의 동작, 눈빛, 말 한마디가 그냥 사라지는 법 없이 모두 확연하게 의식에 새겨진다. “사랑은 시간을 흘러가게 만든다”고 프랑스 속담은 말한다.
시간의 또 다른 본질은 그 속담의 다음 문장이다. “시간은 사랑을 흘러가게 만든다” 사랑뿐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시간을 보내는 주체로 착각하지만 결국은 시간이 우리를 보내 버린다. 나이가 지긋한 한 독자의 말이다.
“성탄 카드들을 받고 보니 착잡하더군요. 작년까지만 해도 부부 두 사람의 이름이 쓰여있던 카드에 한 사람 이름만 쓰여있고, 매년 카드를 보내던 친구에게서 소식이 없어 생각해 보니 그 친구가 더 이상 세상에 없고 …”
현재를 통과하고 나면 시간은 쏜살같이 달아나면서 모든 것을 보내 버린다. 명예, 부, 사랑, 미움, 그리고 마침내 나라는 존재까지.
올해도 365일 시간의 봉급을 또 그냥 허비해 버린 것은 아닐까. 꾸물대며 다가와서 때로 지루한 ‘현재’를 박대하는 사람에게 시간은 냉정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흘러 과거로 편입되는 시간에 무엇을 실어 보낼 것인가 - 2004년 새로운 시간의 봉급을 받기 전에 정답을 찾아 두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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