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통역사는 그 하는 일의 성질 상 보통 사람들이 흔히 접근하지 않는 타인들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일에 노출되고 그에 관한 말을 관계 당사자들 중간에서 전하게 된다.
민사 또는 형사를 막론하고 법정에서 다루게 되는 일은 대부분 개인의 신체적 자유 (더 나아가 생명) 또는 재산이나 가족 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끔 되어 있는 문제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정 안에서, 또는 법정 밖에서 행해지는 증언 청취과정에서 오가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 당사자에게는 운명을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실존 철학자들은 우리의 삶의 모든 과정 자체가 결단의 연속이기 때문에 의미있는 삶을 살기 위하여서는 매 순간마다 우리 존재의 구원과 파멸, 또는 의미와 무의미가 결정되는 의식적인 결단을 똑똑히 내리면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문제는 대부분의 경우 무엇이 적절하고 올바른 결단인지를 알 지 못하는 상태에서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는 데에 있다. 카프카의 소설 ‘재판’은 자기도 알지 못하는 기소 사항으로 재판을 받으면서 계속 강요되는 결단을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모르면서도 내려야만 하는 피고 K의 모습을 마치 유리병에 갇혀있는 곤충을 관찰하듯이 차가운 문체로 그리고 있다.
그처럼 극단적이지는 않다 하더라도 법정에 서야 하는 대부분의 당사자들은 어느 정도 K와 유사하게 이해하기 힘든 상황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결단을 계속 내려야만 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물론 변호사가 옆에서 조언을 해주기도 하지만 현대 사회의 법이라는 것이 하도 복잡하고 까다로와서 무슨 이유로 변호사가 그렇게 하라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변호사 역시 복잡한 설명을 해줄 시간도 없거니와 힘들여 설명을 한다 하여도 듣는 이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가 되기 십상이다. 더욱이 변호사 역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지라 그들의 조언이란 “내 생각에는 이렇게 하는 것이 유리하지만 결정은 본인이 하셔야 합니다” 또는 “최선을 다하여 대답하십시오”라는 식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이렇게 법정이라는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한계 상황, 다시 말해 본인의 능력으로 피할 수도 없고 고칠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그 당사자들이 보이는 반응은 참으로 천차만별이다. 평소에는 감추어져 있다가 듣는 이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적개심, 분노, 탐욕 등이 있나 하면 그 반대로 성인과 같은 자비, 사랑, 용서, 화해의 갈망이 있고 뼈아픈 통한과 후회가 드러나기도 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영영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결정을 못해서, 심지어 통역사에게까지 조언을 구하다가 끝내 필요한 결단이나 대답을 못하는 이들도 있다. 불행하게도 법정에서는 대답을 하지 않는 것, 또는 결정을 하지 않는 것 자체가 하나의 선택으로 간주되고 그에 부응하는 결과가 따라오기 마련이다.
대부분 이러한 반응과 선택은 그 당사자가 살아온 삶의 전체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상 생활에서 모든 삶의 결정을 조심스럽게 그 나름대로의 깊은 성찰 밑에서 해온 사람은 그런 한계상황에 처했을 때 비교적 바람직한 결단과 대답을 수월하게 하는 것을 보게 된다. 다시 말해 생각하며 사는 삶과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삶의 차이가 법정에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생각하는 삶이란 애초에 법정에 설 이유가 없는 삶이라고 우겨 볼 수도 있겠으나 철학자들이 말하는 대로 삶이란 늘 조리 있게 풀려나가지는 않는다는 데에 또 문제가 있다.
김철회/법정 통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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