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TV에서 범고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범고래 무리가 러바스트 고래 새끼를 무려 6시간동안 추적해 마침내 지친 새끼 고래를 사냥하는 방법이 소개됐는데 범고래들이 혀만 먹고 거대한 새끼 고래의 사체를 그냥 버리고 가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그 뒤에는 더 놀라운 장면이 이어졌다. 범고래들이 물개를 꼬리로 쳐서 서로에게 던지며 노는 것이었다. 대개는 이같은 장난이 물개의 죽음으로 끝나는데 이 다큐멘터리에서 한 범고래는 붙잡힌 물개 새끼를 살려주기도 했다. 그냥 버리고 간 것도 아니라 물개 무리가 모여있는 해변까지 살며시 데려다 주는 것이었다. 범고래는 배가 고프지 않아도 재미로 사냥하는 소수의 동물 중 하나로 알려졌다.
한 때 인간을 동물에서 분리하는 것은 말하는 능력이라고 여겨졌었다. 그러나 과학 실험에서 돌고래, 침팬지, 개 등이 언어를 이해하고 단어를 배울 능력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잔혹성이나 자비심과 같은 도덕성이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척도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범고래를 보면 무엇보다도 우리가 동물과 다른 점은 죽음에 대한 자각이 아닌가 싶다.
최근 레이건 장례식에서부터 김선일씨 참수사건까지 온통 죽음이 신문 지상과 TV 화면을 독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침울한 소식을 접할 때 우리는 아무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죽음에 대한 자각은 인간을 동물 뿐 아니라 신들과도 구분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인간처럼 질투하고 싸우고 간통죄도 저지르지만 인간과 다른 점은 오직 죽지 않는다는 것 뿐 이었다.
고대 그리스 시인 호머는 “인간의 상태는 고통받다가 죽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동물의 상태가 아닌가 싶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모든 동물이 함께 갖고 있는 공통점이지만 이에 대한 자각은 종교와 철학은 물론 문학, 예술 등의 인간문화를 가능케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죽음의 현실은 인간의 한계와 잠재력을 동시에 부각시킨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오디세이가 칼립소 여신으로부터 영생을 제의 받았을 때 이를 거절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도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운명이 인간의 천벌이자 특권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우 정 아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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