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중기 실제 거북선 기지창을 보고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고서화의 공개로 한국 고미술 학계는 물론 역사학계의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지금까지 몇몇 역사서 외에 전해져 내려오는 역사적 자료가 없어 논란을 빚어왔던 학계로서는 이 그림이 진품인 것으로 최종 확인될 경우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거북선 역사를 규명하는 연구 작업에 일대 획을 그을 사료로 평가하고 있다.
<사료적 가치>
■유일한 거북선 ‘실경화’일 가능성
전문가들은 이 고서화가 거북선과 지원 선박 등이 정박해있는 군항을 직접 보면서 실사한 뒤 채색한 유일한 거북선 기록화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림을 살펴보면 바람에 의해 깃발이 일치된 방향으로 쏠리고 있는 것과 그림에 나타난 군인과 민간인들의 움직임이 실제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실경화라는 점을 알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와 함께 전문가들은 두 장의 대형 명주천에 가로 1.76m, 세로 2.39m의 크기로 제작됐다는 점과 다른 일반 그림과는 달리 낙관이 없다는 점에서 왕명에 의해 궁중화원이 그린 그림일 수 있다는 의견도 조심스럽게 내놓고 있다.
즉 조선시대때는 그림 높이를 제한했을 뿐 아니라 이만한 크기의 그림을 걸어 놓을 수 있는 장소가 궁궐이 아니고는 힘들 것이라는 해석이다. 또 궁중그림의 경우 일반적으로 화가의 낙관을 찍지 않았다는 것도 이같은 분석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거북선은 2층 구조가 아닌 3층 구조
또한 3층 모양으로 그려진 거북선은 ‘거북선은 2층 구조였다’는 기존 정설을 깨고 올해 초 ‘거북선 3층 구조설’을 제기한 국방부 산하 군사 편찬연구소 장학근 박사의 학설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도 이 그림의 큰 특징으로 꼽힌다.
장 박사는 올 4월 ‘군사 51호’에 기고한 논문을 통해 노와 포가 한층에 있는 2층 구조설은 순간의 기동력이 승패를 좌우하는 해전에 적절치 않다. ‘노젓는 층’과 ‘포 쏘는 총’을 구분한 3층 구조라야 본래의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한국의 전쟁기념관 거북선 등 실제로 그동안 복원된 거북선들은 대부분 기존 2층 구조설을 토대로 제작돼 있어 장 박사의 주장과 함께 이번 고서화의 발견은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거북선의 윗 등이 원형에 가까운 타원형으로 묘사돼 있다는 것도 독특한 점으로 직사각형태의 기존 거북선 등에 대한 새로운 고찰이 필요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대해 재미한국고미술연구가 최영래씨는 울둘목 같은 물길이 거센 남해안 전투에서 직사각형태의 배보다 원형 모양을 가진 배가 더 자유자재로 전투에 임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이같은 견지에서 볼 때 거북선 모양도 앞으로 바뀌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고 평했다.
■거북선 윗등의 십자세로 처음 입증
이번에 발견된 고서화는 역사자료 기록에 있을 뿐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던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학자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선조수정실록’에 수록된 거북선 묘사 중 ‘그 만듦새를 보면 배 위에 판자를 거북등처럼 깔았다. 등에는 몇 사람이 통행할 수 있을 정도로 십자 모양의 작은 길을 만들어 놓았다’라는 구절과 충무공의 조카로 함께 종군한 바 있는 이분의 ‘이순신 행록’에 써 있는 ‘개판 위에는 십자세로를 두어 사람이 출입하도록 했다’라는 기록처럼 이번에 공개된 그림에는 윗 등
에 통행로가 묘사돼 있다.
이제까지 전승돼 온 거북선 그림에서 개판 위에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길이 나타나 있는 그림은 이번이 처음이다.아울러 이 그림에서 주목되는 것은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돼 있는 거북선 모형도와 가장 비슷하다는 점이다.
■조선시대에 사용했던 새로운 무기 등장.
각종 무기류가 대부분 기존사료와 일치하고 있으며 새로운 무기도 찾을 수 있다는 것도 이그림의 사료적 가치를 높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은 쇠뇌만 발견됐을 뿐 지금까지 구체적인 모양새를 알 수 없었던 쇠뇌 발사기와 창만한 크기의 화살을 만들어 폭약을 묶어서 발사하는 무기이다.
이와 함께 그림에는 지휘소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장수와 무기를 점검하는 병사, 보급물자를 나르는 민간복 차림의 일반인들이 함께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전쟁은 민관군합동으로 이뤄졌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해동편(역)사’에서 발췌한 거북선 제원
전문가들은 고서화의 가치가 무엇보다 높은 것은 이 그림에 적혀 있는 거북선 제원의 발견으로 거북선을 거의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가능성을 높였다는 점을 꼽고 있다.
그림 왼쪽 하단에는 일본으로 건너 간 뒤 일본 사학자가 ‘해동편(역)사’라는 역사서를 인용, 써 넣은 것으로 추정되는 발문에 자세한 거북선 제원이 표기돼 있다. 서체가 바래 현재로서는 육안으로 해독이 불가능하지만 거북선의 전장 등 외관 및 내부의 칫수와 방 구조가 상세히 서술돼 있다.
적외선 촬영 등 현대과학을 통해 서체를 판독해 낼 수 있다면 거북선의 원형을 그대로 복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전문가들은 또한 ‘해동편(역)사’의 존재여부에도 주목하고 있다. 해동은 조선을 부르는 단어로 발문에 적혀 있는대로 일본사학자가 ‘해동편(역)사’에서 발췌해 거북선 제원을 썼다고
한다면 이 책은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최영래씨는 현재 우리나라의 역사서는 몇 개의 서적만 남아있는 상태로 발문에 써있는 해동편(역)사를 찾을 수 있다면 한국사를 규명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거북선의 유래 및 변천>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특수 제작된 돌격형 장갑선의 일종으로 한자로 ‘귀선’(龜船)이라고 한다. <태종실록>에 보면 왕이 임진강에서 해전연습을 하는 거북선을 보았다는 기록과 거북선 전법이 결승의 양책이라는 기록이 있는 데 이로 미루어 그 기원을 고려말, 조선초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그 것이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실전에 사용할 수 있도록 창제한 철갑 거북선에 와서야 명성을 떨쳤으며 후대에는 이순신의 거북선 제원에 대한 기술적 전승이 이뤄지지 못하면서 시대에 따라 여러 형태로 조선말까지 각 수영에 존재했다.
1591년(선조 24년) 이순신은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순천부의 영지에 부임하면서 왜구의 침입에 대비, 거북선을 만들 것을 착안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난중일기>에 의하면 여수 앞 바다에서 거북선을 진수한 것은 1592년3월27일이고 이에 장치한 지자포, 현자포를 시험사격한 것은 4월12일이었다.
충무공의 조카로서 함께 종군한 바 있는 이분의 <이순신 행록>등에 기록된 자료를 분석하면 임진왜란 때의 거북선 제원을 어느정도 살펴볼 수 있다. 거북선의 크기는 판옥선의 종류 가운데 가장 작은 각읍진전선과 같았다. 저판길이는 50-55자, 탑승인원은 125명 정도이며 노의 수는 12-14개로 추정되고 있다.
거북선은 임진왜란 뒤에도 수군의 특수함정으로 존속하면서 판옥선의 크기가 커져감에 따라 커져 갔으며 배의 수도 증가, 1745년(영주 22년) 14척, 1808년(순조 8년)에는 30척으로 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김노열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