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예술가곡연구회의 서병선(57. 맨하탄 업타운 거주) 회장이라면 뉴욕 한인 가운데 모르는 이가 별로 없을 것이다.
음악인으로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노래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그를 보게 되면 체구는 비록 적지만 항상 몸 어딘 가에서 강하게 흘러나오는 힘을 느낄 수가 있다. 서 회장에 따르면 이러한 모든 것은 자라오면서 겪은 가난과 어려움이 커다란 힘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신이 준 탈렌트, 노래로 불우한 사람, 어려운 사람, 고통받는 환자들을 위해 지금까지 기금모금 음악회를 수없이 개최해왔다. 그동안 서 회장이 해온 모금 연주회는 한국의 심장병 어린이 돕기, 맹인성악도 돕기, 무지개 집 돕기, 한인복지회관 돕기, 4회에 걸친 북한 어린이 돕기 등을 비롯, 연 2회의 탈북 난민어린이 돕기 자선 음악회 등이다. 올해는 또 커뮤
니티 센터 건립 기금모금 음악회도 11월7일 가질 계획이라고 한다.
서 회장이 이처럼 노래를 하면서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는 이유는 자신이 어렸을 때 가난의 고통을 너무 많이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노래를 하기까지는 많은 경제적 어려움이 따랐다고 한다. 1969년 서울음대 3학년에 재학 중 시카고 어메리칸 오브 뮤직 스쿨의 초청을 받
고 미국에 유학 왔다. 돈이 없어 식당의 접시 닦기, 작은 체구에다 짧은 영어로 하기 어려운 호텔의 매니저 등 가리지 않고 일을 열심히 하였다.
당시엔 경기가 너무 호황이라 사람들이 음식을 조금 베어먹고 그냥 버리는 일이 너무 많아 마음이 매우 아팠다고 한다. 그러나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집에 돌아가면 침을 못삼킬 정도로 목이 아파 그 일도 도중에 그만두고 다시 웨이터 일을 배워 6개월간 일하다 뉴욕으로 건너왔다. 줄리어드 음대로부터 반액장학생으로 입학허가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 당시 그
는 너무 어려워 자전거를 이용, 유명한 배우, 발레리나 등이 자주 오가는 링컨센터 건너편의 식당 ‘Baloon’에서 일을 했다.
낮에는 학교 가서 공부하고 밤에는 식당웨이터로 뛰다보니 너무나 고단해 하루는 새벽 1시쯤 집에 가다가 페달을 잘못 밟아 쓰러졌다. 공교롭게도 음주운전자가 차를 타고 가면서 그의 다리를 치어 루즈벨트 허스피탈에 입원까지 하는 일이 생겼다. 너무나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는 일하던 식당에서 모금도 해주고 음식도 갖다주고 뉴욕한인교회 김병호 목사가 교회
찬양 팀을 데리고 와 위로해주고 돌아간 일을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후 그에게 생각지 않은 행운이 찾아 왔다.
78년 아리스 인터내셔널 국제 콩쿨 대회에서 성악부문에 당선된 것이다. 같은 해 카네기 홀에서 데뷔 독창회를 갖고 정식으로 성악가로
의 길을 걷게 됐다. 당시 뉴욕 타임즈는 그의 노래를 듣고 ‘독특한 인간미와 개성을 지니고 있어 많은 것을 청중들에게 줄 수 있는 좋은 소리’라고 격찬했다고 한다. 한인사회 초기에는 그가 최초로 연주회를 가져 한인사회가 들뜨기도 했었다. 77년에는 맨하탄 음대 보딘 오디토리엄에서 에밀레 오페라단과 춘향전을 공연했다.
이것을 시작으로 그는 지금까지 한인사회에 도움만 된다면 주저 않고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그래서 그는 뉴욕의 한인들과는 제일 가까운 성악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서 회장은 특히 주체성이 강한 성악가로 알려져 있다. 서방의 오페라에 대한 반대 론을 주장하며 노래를 부를 때는 한사코 한국고유의 가곡 부르기를 고집한다. 오페라에 대해서 강한 회
의를 느꼈기 때문이란다.
이탈리아에 장학금을 받고 가서 공부하면서 오페라에 대해 회의가 오기 시작했다는 것. 이탈리아 노래가 모두 마피아가 탄생될 수 있을 만큼 격정적이고 난폭하고 잔인성이 가득하더라는 것이다. 안되겠다 싶어 86년에 오페라 해독 론 ‘opera as godzilla’을 써서 전세계 언론, 교육기관 155개소에 보냈다. 그 글이 뉴욕타임스 레저판 탑을 장식하기도 했다. 그가 이
렇게 나선 이유는 현대사회에서 인간 정서가 메말라가게 만드는 잔인 무도한 살인행위, 가치관이 붕괴되는 것은 이탈리아 오페라도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란다.
그만큼 오페라는 외향적으로는 화려한 종합예술이지만 알고 보면 인간의 정서, 영혼, 사랑을 고갈시키는 음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오페라가 우리를 파괴하는 것인가, 우리가 오페라를 파괴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로 전세계가 떠들썩, 비난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88년에는 음악동아 올림픽 기념특집에 4페이지에 달하는 오페라 반대기사를 게재, 한국의 오페라 애호가들이 ‘서병선 죽여야 한다’고 아우성인 적도 있었다. 한국은 가곡이 능력 없는 자만이 하는 것으로 외면하고 대부분 오페라를 해야만 성공하고 빛을 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면 99%가 오페라에 전념하는데 실은 오페라 하면 소리가 망가져 가곡을 잘 부를 수가 없게 된다. 때문에 가곡을 통한 인류정신, 정직성
이 회복 안돼 문화적인 피해를 상당히 보고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는 링컨센터 엘리스 털리 홀에서 3차례 독창회를 가졌다.
미국언론에서는 그 당시 ‘동방에서 온 빛나는 테너’ ‘자애심을 지닌 뛰어나게 아름다운 소리’라고 평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가곡의 중요성을 깨닫고 가곡을 보급하기 위해 뉴욕예술 가곡연구회를 창설, 후진들을 상대로 가곡을 배포해 왔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뜻 있는 연주회를 통해 한인사회 봉사활동에도 열심이었다. 그는 고교를 졸업한 후 너무 가난해서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기 위해 절을 빌려 야학 당을 시작, 80명의 동네 아이들을 가르친 적도 있다.
학교를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문교부에 알아보기도 했으나 좌절됐다. 자신이 법관이 되어 ‘내가 짓겠다’는 생각으로 산중에 들어가 3년간 고등고시 공부도 했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선택한 것이 음악도의 길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고난의 체험을 통해서 자신에게 선물로 준 노래로 뭇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정서, 그리고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있다.
한인들도 그의 좋은 취지에 적극 공감, 그의 활동을 적극 돕고 있다고 한다. 서 회장은 그의 활동이 점점 결실을 맺는 것에 대해 ‘끊임없는
동포들의 사랑과 지원 덕’이라고 감사해 한다. 그 중에서도 지금까지 10년 이상 물심 양면으로 도움을 준 강현석 고문의 아낌없는 배려가 특히 더 고맙다는 것.
또 오늘날까지 어려움 속에서도 말없이 자신을 내조해온 부인 서양희(49)씨의 정성과 노고도 그저 고마울 따름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음악회 리허설이 있으면 직장까지 쉬면서 연주자들의 음식을 직접 만들어주고 홍보 전단지 붙이고 하는 등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서 회장도 지금까지 무슨 음악회를 할 때마다 직접 편지하고 전화하고 전단지 붙이는 등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다. 보람있는 일이기 때문에 힘들어도 기쁜 마음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2000년도부터 하고 있는 ‘탈북 난민 돕기 음악회’는 자신이 어렸을 때 너무 가난해서 아무 것도 못 먹고 물만 마시고 자다 보면 배가 끊어질 듯이 아픈 적이 많았다며 굶는 고통이 얼마나 심각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하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1회 때는 음악회 수익금 8,000달러를 허리에 차고 중국에 직접 가서 꽃 제비를 통해 탈북자를 도왔다. 그 후 이 행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고난의 체험을 통해 나오는 그의 노래는 앞으로도 계속 어려운 이웃을 위해 많은 위로와 격려가 될 것이다. 슬하에는 올해 스쿨 오브 비쥬얼 아트 스쿨에 입학한 외동딸 실비아(18)양이 있다.
여주영 논설위원
(juyou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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