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준설공사- 조선 21대왕인 영조(1760)가 청계천 준설공사 현장을 직접 살펴보고 있다. 백성들이 소를 동원 준설작업을 하고 있다. 그림 오른쪽에 친임관역(親臨觀役)이라는 휘호가 적혀있다.
국내외 유일.조선 영조때 준설기념‘준천계첩’제작.
50년부터 버클리대 보관
지난해 7월부터 복원공사가 진행중인 청계천 준설공사 자료가 버클리대학 동아시아도서관(East Asian Library)에 소장되어 있음이 확인됐다.
동아시아도서관 아사미(Asami)콜렉션에 국내외에서 유일에게 보관되어 있는 이 자료는 조선 영조36년(1760년)에 청계천 준설공사를 마무리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준천계첩(濬川?帖) 책자이다. 이 책자에는 영조가 친필로 신하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글과 공사에 동원된 자세한 인력 내용, 4점의 목판 그림이 담겨있다.
왕실의 화원들이 그린 이 그림은 영조가 친히 공사 현장을 둘러보는 장면,공사 완공뒤 신하들과 가진 연회 장면,공사를 축하하는 활쏘기 시합장면등을 스케치한 것들이다. 특히 영조가 준설공사 현장을 친히 둘러보는 ‘친임관역’(親臨觀役)이라는 휘호가 적혀있는 그림은 실제 백성들이 소를 동원해 준설 장면을 보여주는 국보급 그림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이 그림에는 지금은 볼 수 없는 오간수문(五間水門)등 청계천의 옛 모습도 자세하게 담겨있다.
조선 21대 왕인 영조는 장마철마다 청계천이 범람해 도성내 백성 수백명이 목숨을 잃자 영조 35년(1759)에 준설을 담당할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했다. 이듬해 2월부터 공사에 들어가 4월까지 개천내 쌓인 오물과 토사 수백만 가마니를 준설했다. 또 토양 유실을 막기 위해 버팀목을 설치하고 퍼낸 흙으로 제방을 쌓았으며 주요 다리도 개축했다. 준설 연인원은 21만5천380명,소요경비는 3만 5천냥(쌀로 환산 1만 2천석)이 소요되는등 조선 최대의 치수사업으로 기록되어 있다.
버클리 동아시아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자료는 조선 통감부 법제관(경성고등법원 판사겸직)이었던 아사미 린린타로가 수집,일본으로 가져갔다가 1920년 삼정(三井) 재단으로 넘어갔다가 1950년 버클리대학에서 구입,오늘에 이르게 됐다. 아사미자료로는 이밖에도 희귀본인 ‘한중록’‘광개토대왕비’탁본등 4천여점이 소장되어 있다.
<손수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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