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봄이다. 세상의 빛깔이 어느 결에 연한 초록으로 빛을 발한다. 아니, 여기저기 자리한 개나리에 의해 노란빛이다. 마치 동면하는 동물처럼 겨우내 움츠려 지내던 나도 이젠 서서히 기지개를 켜본다.
창에 내비치는 세상 빛을 음미하는데, 잃어버린 내 목소리로 노래가 하고 싶어졌다. 그래도 한때는 어느 노래이건 자유자재로 부를 수가 있었다. 그러던 내게, 노래란 단조 가락인 걸로 생각이 들었다. 단조의 노래를 선호하던 내가, 이제는 장조의 노래로 방향을 틀었다.
노래란 음악의 한 부류이다. 음악 하면 전공은 하지 못했지만 클래식을 비롯해 가곡, 가요, 복음성가, 민요 등 하여간 가락을 즐길 수 있으면 모두 좋아한다.
그런 탓으로 나는 삶을 음악과 비교하는 것을 좋아한다. 요사이는 대중가요도 밝고 희망적으로 노래를 한다. 예전에 슬픈 노래를 불렀던 가수들은 거의가 좋지가 않았었다. 나도 잃어버린 육신의 기능 탓으로 암울한 노래를 즐겼다. 화려하게 지내지도 않았는데 끝장인 양 자조하는 기운에 싸여 지냈다.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큰 기쁨을 얻는다. 문자로 기록된 여러 사람의 이야기로 용기를 얻고, 또 라디오에서 해주는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로 위안을 삼는다. 장애를 딛고 용감하게,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 관심이 간다. 아마도 나도, 나에게 놓인 장애를 이겨보고자 하는 마음일 것이다.
이제는 즐겨 부르는 노래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생각이 바뀐 탓이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내 자신이 하나도 흉물스럽지 않다. 또 감사하게도 불편함이 점차로 줄어든다. 그러면서 새로운 어떤 결론을 얻는다. 사람은 누구나 주어진 환경에 적응된다는...
특히 우리 한국사람은 누구나에게 감춰져있는 힘과 지능으로 보란 듯이 존재한다. 몰론 유태인이나 일본인만큼 유연하게 지내지는 않더라도 강한 정신으로 이겨낸다. 언젠가 들었는데 우리나라 사람은 에스키모에게 냉장고를 팔 수 있고,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난로를 팔 수 있다고 한다.
활동에 제한을 받으며 지내는 나. 요즘은 머리를 쓰며 손가락 하나로도 많은 성과를 얻으며 지낸다. 단조의 노래가 절망중의 나를 데리고 가더니 이제부터는 기운찬, 희망의 노래가 입가에서 맴돈다. 그래서 지금 느껴지는 봄이 더욱 아름다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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