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이란 곧 하나를 뜻한다.
요사이 우리 나라 젊은 세대의 계산법은 아니다. 나조차 흐리멍덩한 이런 산술법에 반감을 많이 갖고 지냈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란 성경말씀처럼 지냈었다. 그러니까 하나를 빌렸으며 더도 덜도 아닌 하나만을 갚았다. 누가 나에게 100원을 빌려갔으면 100원만을 받았다. 물론 이자 계산은 따로 정확히 했지만 말이다.
이렇듯 세상살이를 공식에 맞추던 나. 언제부터인가 틀에 갇힌 것 같아 숨이 막혀왔다. 어쩌면 정확한 크기를 알 수 없는 것을 대략 눈대중으로 맞추느라 피곤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휴식을 얻기 위해서랄까 오랜 동안 지켜오던 산술법에 혁신이 일어났다. 아니, 나도 옛사람들의 산술법에 더 정감을 얻은 거다. 뭐든지 대충 넘어가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던 내가 지금은 대충 살아간다. 그래서 나도 반이 하나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콩나물도 수퍼마켓에서 저울에 단 양만큼 돈을 지불한다. 지난날 시장어귀에서 콩나물을 사면 덤으로 얹어주는 양이 돈을 내고 산 콩나물의 양이었다. 콩나물 장수 아줌마도 하나가 반이고 반이 하나란 계산법이니까.
나는 헬렌 켈러의 말에서 용기를 얻고 지금 이 순간에 호흡을 씩씩하게 하고 있다. “내가 만약 3일 동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지금 난 창 밖에 짙게 푸르러가는 나무, 그리고 퇴색해가는 꽃을 바라보고 있다. 봄에는 기대에 찬 손으로 나뭇가지에서 돋아나는 꽃눈을 마음으로 만질 수 있고 여름에는 강렬히 내리쬐는 희망을 얻어 쥘 수 있으며, 나름대로의 가을과 겨울을 느낄 수 있으매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나의 눈을 내 몸뚱아리의 반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용기를 지닌 아침, 그리고 실질적으로 한 해를 시작하는 봄, 그 순간에 얼마나 감동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에 따라 알찬 하루와 한 해를 지니는 거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반쯤 들어있는 컵의 물을 보고 반밖에 없다고 투덜거리는 사람과 아직도 반이나 있다고 기뻐하는 사람과의 차이다. 그래서 나는 어리숙한 우리의 옛사람의 습관을 좇으려 한다. 반으로도 하나를 즐길 수 있는 풍요로움과 여유로움.
탈무드 왈,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다 라고 했다. 나도 역시 현명해지기를 소원하고 있다. 그런데 난, 지혜를 현재에서 구하지 않는다. 마음이 여유로웠던 옛사람에게서 지혜와 요령을 배운다. 그래서 더불어 내 계산법도 희미해졌다.
반은 곧 하나라는 계산법으로.
김부순 <버크,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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