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람/들
진선미기금이 무럭무럭 클 때까지
일흔 앞둔 박구영 여사가 주방을 안떠나는 까닭은…
두해 남짓 지나면 일흔이 되는 박구영 여사(67)는, 일요일과 월요일을 빼놓고, 아침 9시가 가까워지면 어김없이 ‘주방 할머니 복장’으로 갈아입는다. 앞치마까지 두른다. 그리고는 1996년형 닛산 미니밴을 몰고 뉴왁의 집을 나서 약15분 거리 일터(밀피타스와 프리몬트 중간 한국식당 ‘한도식당’)로 달린다. 도착하면 대략 9시15분쯤. 곧장 물 끓이고 나물 삶고 쌀 씻고 밥 짓고…. 오후 9시가 돼야 주방에서 해방된 그가 지친 몸을 이끌고 동갑 남편(박창기)이 기다리는 집에 들어서는 시간은 보통 9시30분쯤. 그가 늘그막까지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은 가난 때문일까.
차가 있고, 집이 있고, 때가 되면 웰페어가 나오고, 딸 셋 모두 커 부모노릇 몫으로 돈을 벌여야 할 필요가 없고, 부부 둘 다 건강하다는 것만 해도 그는 부자다. 게다가 딸들은 누가봐도 잘 풀렸다. SFSU와 뉴욕대학원을 나온 맏딸 수진 씨는 웰스파고은행 프로젝트매니저로 쏠쏠한 연봉을 받는다. 둘째딸 선희 씨는 UCLA와 이곳 교육대학원을 나온 뒤 남가주 랜초쿠카몽가에서 초등학교 교사, 사위는 카이저병원에 근무하는 한인의사다. 막내딸 수잔 씨는 UCLA를 졸업하고 스탠포드법대에 재학중인 법조인지망생이다.
효녀로 소문난 딸들은 한사코 만류했다. 그러나 끝내 말리지 못했다. 그 전에는 일하면 좀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한 뒤로는 힘든 줄을 몰라요. 그거 하고나니까 기분이, 내 자신이 행복해요.
지난 25일 오후 억지로 인터뷰장에 나와서도 아니 내가 무슨…창피해요라고 극구 사양하다 조심스럽게 연 박 여사의 말문을 통해 ‘황혼노동’의 참뜻이 실려나왔다. 저는 이 나이에 지금도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보고싶어요, 돌아가셨지만. 그런데 어린 가장들이 참…. 부모없는 아이들이 제일 불쌍해요.
저는 이 나이에 지금도
어머니 아버지가 보고싶은데…
그는 본국 소년소녀가장을 돕기 위해 ‘진선미기금’이라 이름붙인 나눔기금 1,000달러를 최근 북가주아름다운재단에 기부했다. 또 매달 그 기금에다 30달러씩 손수 보태나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아름다운재단과 미스 최(최용오 상임이사)한테 고마워요. 이런 일을 할 수 있게끔 해줘서.
진선미기금이 그의 첫 선행은 아니다. 오래 전부터 알게 모르게 이웃돕기를 실천해왔다. 얼마전 신문에 난 강원도 어디 아이들을 도와주라고 서울로 가는 친구에게 500달러를 쥐어보내고, 아침 6시쯤 잠에서 깨어나서 밤 12시쯤 잠들기 전에 그리고 운전 중이나 잠시 쉬는 시간에 가족을 위해 이웃을 위해 고통받는 환자들을 위해 그리고 요즘에는 우리 아름다운재단 크게 해주시라고 기도하고, 천주교봉사단체 ‘레지오’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등등.
가난이 지배하던 1950년대 후반, 그래서 딸들은 보통 아들을 위한 돈벌이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그 시절, 서울에서 여고(명동성당 옆 계성여고)를 나와 대방동 해군본부에서 약10년동안 근무하다 한국전력 직원이던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사업가(건설업)로 변신한 남편을 뒷바라지하면서 딸 셋을 키우고, 시동생 초청으로 1980년12월 이민가방을 싸고, 샌리앤드에 터잡은 뒤 미국에서의 첫 성탄절을 즐길 겨를도 없이 열사흘만에 팔자에 없는 식당일을 시작하고, 손 여기저기 칼 배인 자국들 불 데인 자국들, 그것들이 늘어나는 사이 세월은 흘러 주방 아줌마에서 주방 할머니 나이가 되고, 코흘리개 딸 셋은 어엿한 어른이 되고….
그러나 박 여사는 주방일과 헤어질 생각이 아직은 없다. 앞으로 5년은 더 끄떡없이 할 수 있을 것 같고 또 그럴 생각이다. 부모없는 아이들을 위해 새로 낳은 ‘진선미기금’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걸 보고싶어서다. <정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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