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나이를 먹어 가면 그 변화는 신체적으로만 감지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전에는 틀림없이 옳다고 생각되었던 것들이 “과연 그렇기만 한가?” 하고 흔들릴 때가 많다. 거창하게는 사고가 성숙해 가는 것이고, 쉽게 말하면 세상 무서운 줄 알게 된 것이리라.
내가 일하고 있는 국제 로타리라는 단체는 국제적인 봉사단체이다. 20대 시절 나는 이 봉사니 자선이니 하는 단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유신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에 대학을 다녔던 나는 소위 말하는 운동권의 영향을 많이 받았었다.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이런 봉사니 자선이니 하는 것들은 사회의 보다 구조적인 문제들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는 사탕발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굶주린 사람에게 당장 물고기부터 먹여 기운을 차리게 하는 일도 필요하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애정과 선의이고, 이것이 죽어가던 생명을 살려낸다.
최근 한국에서 나라가 뒤집어지다시피 하는 황우석 교수와 ‘PD 수첩’ 간의 논란을 바라보며 어찌된 일인지 대학 시절 운동권 학생들이 떠올랐다. 지난 날, 이상과 열정에 사로잡혀 엄청난 고난의 길을 감수하면서도 어쩐지 2% 부족하게 느껴졌던 그들의 모습과 ‘PD 수첩’ 제작진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처음에 ‘PD수첩’이 난자 기증의 윤리 문제를 들고 나왔을 때만 해도 나는 ‘PD수첩’ 편이었다. 한국의 언론들, 특히 조중동으로 일컬어지는 보수 언론들이 황우석 교수의 성과를 ‘단군 이래의 쾌거’로 띄우는 것을 보며, 그가 이같은 풍토에서 진정한 학자의 길을 계속 갈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들던 참이었다.
아울러 ‘PD 수첩’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는 한국적인 성과 지상주의에 일침을 가해주길 바라는 심정이었다. 이제는 한국 사회도 조금 더디 가더라도 절차상의 투명성을 중시하는 성숙한 사회로 발돋움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후 불거진 취재 윤리 논란을 보며 이들도 2% 부족한 사람들이라는 아쉬움을 금할 길 없었다. 이들의 취재 명분 자체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의혹이 있다면 진실을 밝혀야 한다. 그러나 이들의 시도는 척박한 환경에서 묵묵히 연구에 정진해 온(적어도 우리가 그렇게 알고 있는) 한 학자, 아니 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를 깔고 시작했어야 옳았다. 또한 그간 황교수의 연구 성과를 인정해온 모든 단체며 기관의 권위에 대한 존중도 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그들은 취재 과정에서 좀 더 조심했을 것이고, 객관성을 유지하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였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번 사태를 진보와 보수간의 싸움으로 보기도 한다.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일면 수긍이 가는 점도 있다. 이번 사태가 소위 말하는 진보 진영이 좀 더 내적 성찰과 겸손함을 갖출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섣부른 독단과 공명심으로 자신들이 품은 이상과 정당한 명분마저 파묻히게 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한수민
국제 로타리 세계본부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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