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기업들이 은퇴한 근로자들에게본격적으로 연금을 지급하기 시작한 것은 세계 제2차 대전 이후부터다. 유럽과 아시아 대부분의 국가가 폐허가 돼 있었을 때 미국은 주요 국가 중 유일하게 전쟁의 참화를 피해 전례 없는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 경제는 전시 체제에 묶여 기업들이 임금과 상품 가격을 마음대로 정하지 못하고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세계의 공장’으로 미국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상품 주문이 쏟아져 들어오자 미국 기업은 인력난에 시달렸다. 사람 구하기는 어렵고 임금은 마음대로 못 올리는 상황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건강 보험과 은퇴 연금 같은 소위 ‘종업원 복지 혜택’이었다. 직장에 다닐 때는 물론이고 은퇴한 후에도 종업원의 재정과 건강을 회사가 책임지는 것이 대기업 사이에 일반화됐다. 50년대와 60년대는 근로자의 천국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70년대 들어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서유럽과 일본 경제가 부흥하면서 미국 기업들이 도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자동차, 철강, 의류 등 제조업 분야에서 미국 기업은 경쟁력을 잃기 시작했지만 종업원에 대한 혜택은 줄지 않았다. 그러나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전세계 경제가 단일 시장으로 통합되면서 미국의 독보적인 지위는 사실상 사라졌다. 2차 대전 직후 세계 GDP의 50%를 차지하던 미국 경제 비중은 25% 이하로 떨어졌다. 자본의 이동이 자유로워지면서 미국 근로자들이 특권을 주장하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기업 입장에서 보면 인도나 중국에 공장을 차리면 인건비를 1/10로 줄일 수 있는데 굳이 비싼 돈을 주고 미국 근로자를 채용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세계화 추세의 피해가 직접적으로 나타난 곳이 종업원 복지 혜택이다. 현재 일을 하고 있는 직원 월급 주기도 바쁜데 은퇴한 직원들의 건강과 연금을 챙길 여유가 없어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인들의 평균 수명은 날로 늘어나고 의료비는 치솟는 바람에 아무리 우량기업이라 해도 이를 대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한 때 세계 최대 기업이었던 GM이 파산 일보직전까지 간 것도 차가 안 팔린 탓도 있지만 은퇴 근로자의 건강 보험과 연금 부담을 견디지 못한 탓도 크다. GM은 차 한 대 만드는 데 들어가는 철강 값보다 의료비 비중이 더 크다.
GM의 전례를 본 미국 기업들은 너도나도 앞다퉈 연금제를 없애고 개인이자기 은퇴를 책임지는 401k로 전환하고 있다. 올 초 IBM이 연금제를 폐지하고 401k제로 돌았으며 버라이존, 휼릿 패커드, 모토롤라는 이미 오래 전 이를 시행 중이다. 최근 뉴욕 지하철이 25년 만에 파업을 벌인 것도 연금제 때문이었으며 현재 UPS도 이를 놓고 근로자와 협상 중이다.
유나이티드와 같은 일부 기업은 아예 연금과 의료 보험 부담을 피하기 위해 파산을 신청하기도 한다. 기업이 파산하면 그 부담은 정부 기관인 연금 보장 공사(PBGC)로 넘어가는데 이 공사는 앞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현재로도 엄청나게 재원이 부족한 상태다.
아직까지 정부 공무원은 이런 걱정 없이 은퇴 후 연금과 의료 보험 혜택을 누리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종업원 복지비용을 정기적으로 보고해야 하는 기업과는 달리 정부는 이를 발표하지 않기 때문에 총 부담액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주 및 지방 정부 차원에서만 은퇴 연금 부족분이 이미 1조 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기업이 개개인의 은퇴를 보장해주던 시절은 지나가고 각자가 자기 앞날을 챙겨야 하는 시절이 오고 있다. 가장 좋은 은퇴 준비는 일찍 시작하는 것이다. 20대에 1,000달러를 주식 인덱스 펀드에 넣어두면 30년 후에는 1만6,000달러(지난 60년간 주가 연 평균 상승률 10%를 적용했을 때)가 된다. 얼마나 젊었을 때 준비를 시작하느냐가 편안한 노후와 고단한 노후를 가른다. 은퇴 계획 세우기를 새해 결심의 하나로 꼭 넣어두자.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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