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전후사의 인식’(이후 해전사)은 5공화국 초 민주화운동에 우호적이었던 민간 학자들이 당시 극우 군부권위주의 역사 해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한국전쟁 등 금기시된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연구로 출판되어 대학가에 한국 현대사 연구 붐을 일으킨 책이다. 그 신선한 충격은 권위주의 체제에서 억눌렸던 담론이 수면위로 분출되어 공개적으로 논의되었다는 점에서 해방적 체험이었다. 그러나 이 책의 일부 저자들은 당시 좌파 민중-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연구를 하였다.
30년의 세월이 흐른 후 ‘해전사’는 또 하나의 도그마가 되었고 그 폐단이 심각한 상황이 되었다. 한때 해방과 민주화의 상징이었던 ‘해전사’가 21세기 초에는 도리어 한국사회 발전의 족쇄가 되어버렸다. 이에 이를 극복하고 왜곡된 좌경적 역사인식을 시정하려는 의도의 일군의 학자들이 공동 집필한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약칭 ‘재인식’)이 최근 출간되었다. ‘재인식’의 출간은 큰 격변을 겪은 한반도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기반으로 한국 현대사의 왜곡된 인식 틀을 바로잡기 위해 등장한 학문적 공동 노력이라는 점에서 환영해야 할 사항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역사 청산의 과제는 지배세력의 이념과 권력문제와 맞물려 있어 간단하지 않다. 80년대 초 ‘해전사’가 등장했을 때에 주된 과제는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소외되고 금기시된 좌익 공안사건의 피해자나 반독재 인권운동의 피해사태를 고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본격적 민주화운동의 시기를 겪으면서 ‘해전사’의 관점은 피해자를 옹호하는 약자의 논리가 아니라 본격적인 좌익이념을 펴기 위한 공세적 구도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80년대 후반에는 급기야 ‘주체 사상론’으로까지 급진전되어 남한 체제의 혁명적 해소를 주장하는 좌익 사회주의 세력을 배태하는 의도되지 않은 역할을 하고 말았다. 민주화 투쟁의 우회적 방편으로 진보적 학자들에 의해 제공된 세칭 진보사관이 학자들의 원래 의도와는 달리 남용되었을 때에 그 이념적 편향성이 증폭되어 무서운 결과로 발전한 것이다.
역사 청산문제는 사실 매우 어렵고도 장기적인 작업을 요하는 것이다. 우선 역사 청산에는 역사 인식의 정확성과 공정성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 대항하여 제시된 ‘해전사’의 민중민족주의 사관이 더 이상 한국사회에 통용될 수 없게 되었고 자유민주주의 사관으로 바뀌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역대 어느 정부보다 더 야심적인 과거사 청산의지를 표명하였고 발족시킨 관련 위원회기구만 13개에 달한다. 대부분이 과거 국가 권력의 남용에 따른 피해사태를 시정하고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한 목적에서 결성되었지만 남북대치 상황에서 희생된 국군포로나 납북자와 탈북자의 피해 문제는 배제되어 청산 대상의 선택에 있어서 편향성이 나타난다. 또한 위원회의 구성에서 정부 측 인사들이 거의 절대적 다수를 점하는 상황에서 공정한 심사가 과연 이루어질 것인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이런 상황에서 한 시민단체가 정부의 과거사 위원회 활동을 감시하는 모니터링 단을 설치하기로 한 것은 과거사 청산이 정략적으로 오용되는 사례를 막기 위한 중요한 시민적 결단이다. 지난번 선거에서 야당후보를 대상으로 한 조작된 정치공세가 있었음을 기억하는 시민들은 대통령 선거를 겨냥하여 정치권이 과거사 청산문제를 정략적으로 활용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사 청산은 보복이나 한풀이식의 과거를 향한 청산이 아니라 미래의 발전과 통합의 기반을 닦고 화해와 관용 정신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김용직
성신여대
정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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