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와 닿는 좋은 글을 보면 잊지 않고 이 메일로 보내주는 분이 있다. 오늘 아침 이 메일을 여니 이런 글이 배달되어 있었다.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렇고 그럽디다. 능력 있다고 해서 하루 열 끼 먹는 거 아니고, 많이 배웠다고 해서 남들 쓰는 말과 틀린 말 쓰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발버둥치며 살아봤자 사람 사는 일 다 거기서 거깁디다”
새 봄의 햇살처럼 해말간 동승들의 천진한 이미지와 함께 이어진 글은 물질적 욕망 때문에 우리가 진짜 삶을 잃어버리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대궐 같은 집에서 호화롭게 사나, 작은 아파트에서 아등바등 사나 세월 지나 되돌아보면 사실 다 거기서 거기이다. ‘소유’가 삶의 본질을 좌우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람의 삶이 다 거기서 거기일까.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옆에서 봐도 오아시스처럼 풍성한 삶이 있는가 하면 사막처럼 메마른 삶이 있다.
삶에서 그런 차이를 만들어내는 요인은 무엇일까. ‘사람’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된다. 문제는 ‘누구와 같이 사느냐’이다. 인생이라는 여정을 어떤 사람들과 같이 가느냐가 삶의 질을 좌우한다.
가장 중요한 ‘길동무’는 물론 가족이다. 태어나면서 부모를 만나고, 형제들과 성장기를 같이 보내고,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이 태어나 어린 길동무가 된다. 여기에 삶의 여정 중간 중간에 끼여든 인연들, 친구들이 더해지면서 우리 인생의 길동무 윤곽은 완성이 된다. 가족이라는 몸통, 그리고 친구라는 곁가지들이다.
그런데 중년이 되고 자녀들이 성장해 집을 떠나면서 관계의 구도에 변화가 온다. 가족 쪽에 있던 무게 중심이 친구 쪽으로 옮겨가는 변화이다. 친지 중에 전문직에 종사하는 40대 후반의 이민 1세 여성이 있다. 부모 형제는 모두 한국에 있고, 남매는 대학으로 떠났고, 남편은 사업상 현재 한국에 살고 있다. 그는 요즘 친구의 중요함을 절감하며 산다고 했다.
“남편과도 아이들과도 여전히 좋은 사이이지만 물리적 거리는 어쩔 수 없어요. 그날그날 일어난 일들을 시시콜콜 같이 나누고, 몸 아플 때 와서 죽이라도 쒀 주는 사람들은 친구들이에요”
‘친구’가 ‘가족’의 자리를 차지하는 현상은 요즘 미국 사회에서도 주목하는 추세이다. 학교·직장 따라 동부·서부로 이동하면서 생기는 물리적 간격, 이혼·재혼으로 가정이 무너지고 재구성되면서 흐려진 가족 개념 등이 원인이 되어 가족보다는 친구들과 더 가까운 삶이 한 흐름이 되고 있다.
미국에서 가족 없이 혼자 사는 가구는 전체의 1/4이나 된다. 젊은이들은 결혼을 늦추거나 안하고, 이혼은 많고, 평균 수명이 길어져 배우자와 사별하고도 오래 사는 노인들이 늘어나면서 1인 가정이 많아졌다.
이렇게 혼자 사는 사람들에게 삶의 실질적 동반자는 멀리 있는 가족 아닌 이웃의 친구들. 서로 마음이 통하다 보니 자주 모이고, 모이다 보니 가족처럼 가까워진 이웃 사촌들을 사회학자들은 ‘선택에 의한 가족’이라고 부르고 있다.
며칠전 뉴욕타임스는 중가주 데이비스에서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는 노인들의 이야기를 실었다. 은퇴한 핵물리학 박사, 전직 교수 등 80세 전후의 노인 12명이 돈을 모아 땅을 사고 집을 지어 같이 노년을 보낼 협동 주거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각자의 타운하우스에서 프라이버시는 유지하면서 공동 부엌, 식당, 리빙룸에서 같이 먹고 같이 돌보며 공동생활을 할 예정이다.
이들은 한 동네에서, 같은 교회에서 수십년 친구로 지내오다가 인생의 마지막을 양로원에서 보내지 않기 위한 방안으로 공동체 생활을 구상했다고 한다. 멀리서 각자 바쁜 자녀들에게 기대기보다는 가까이 있는 친구들끼리 서로 보살피며 살자는 아이디어이다.
사람 사는 일 다 거기서 거기다. 욕심 부리며 평수 늘리고 값비싼 것으로 몸을 둘러봤자 거기서 거기이다. 그보다는 알토란같은 진짜 친구들을 만들어놓는 것이 현명하겠다. 장차 나는 누구와 살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해답이 나온다.
권정희 논설위원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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