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서울은 봄의 길목인 3월에 접어 들었음에도 꽤 추웠다. 도심의 고층 건물 그늘을 핥고 지나가는 북풍은 아직도 LA에서는 맛볼 수 없는 만주의 매서움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봄 샘 추위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마음은 한껏 고무돼 있었다. 월드컵 개막 100일을 앞두고 열린 앙골라와의 대전에서 한국이 완승을 거둔데 이어 5일 열린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1라운드 A조 최종전에서 한국이 아시아 최강 일본에 3-2로 통쾌한 역전승을 거뒀기 때문이다. “요즘은 스포츠 보는 재미로 산다”는 말이 사람들 사이에서 절로 나온다.
아직 월드컵까지는 석 달 이상이 남았음에도 한국의 축구 열기는 벌써 도를 지나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TV마다 아침저녁으로 월드컵 특집을 내보내며 지난 수개월 간 한국팀의 전지훈련 과정을 상세히 보도하는가 하면 한국과 싸울 상대팀 전력 분석에 여념이 없다. 객관적인 전력으로 보면 스위스나 프랑스 모두 만만한 팀이 아닌 것 같은데도 8강이냐 4강이냐가 문제지 한국의 16강 탈락을 우려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다 만약의 사태가 벌어질 때의 충격은 감당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길 가 빈터에서는 수시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꼭지점 댄스’로 불리는 월드컵 응원 춤 잔치가 벌어진다. 한 사람이 선두에 서면 나머지가 삼각형 모양을 만들어 주는 추는 춤으로 동작이 간단하고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도 같은 모양이 만들어지기 때문인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 2002년 월드컵 특수를 예상치 못했던 기업들은 기업들대로 이번 행사를 자사 제품 판촉과 홍보에 이용하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고 연예인들도 이를 기념해 새 음반 제작과 공연 준비에 여념이 없다.
좀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다가도 한 주간 쏟아져 나오는 뉴스를 보면 오죽하면 국민들이 그렇게 스포츠에 매달릴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제1야당 사무총장의 여기자 성추행, 국무총리의 범죄자들과의 골프 회동, 교도관의 여죄수 성추행, 지하철과 철도 파업, 황우석 조작 지시 시인, 황우석 지지자의 노성일 폭행 등 도무지 시원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고 한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개탄하게 만드는 소식뿐이다.
길거리에 나와 보면 한 시간을 기다려도 지하철이 오지 않아 새 학기 첫날부터 늦게 생겼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학생과 직장인들, 그래도 택시 값 몇 천원을 아끼겠다고 타지 않아 줄줄이 늘어선 채 한숨만 푹푹 쉬고 있는 기사들, 경기는 회복된다는데 전혀 나아진 게 없다고 탄식하는 상인들 모습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이들의 쌓이고 쌓인 분노는 멋모르고 파업을 일으킨 철도 노조한테로 향해 노조 지도부는 파업 시작 2~3일 만에 무조건 업무 복귀로 결론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한민국은 노조가 없어야 산다”는 말은 이제 기업주가 아니라 일반 서민과 실업자들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50대 아버지는 명퇴로 집에 들어앉은 지 오래고 대학 나온 아들은 몇 년째 취직이 안돼 빈둥빈둥 놀고 있는 집이 한둘이 아니다. 이들에게 노조의 고상한 구호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 이 바람에 이번 파업에 강경 대응한 전직 민주 투사 겸 사형수 이철 철도 공사 사장의 인기는 하늘로 치솟고 있다 한다.
한국민은 폭발적인 저력을 지닌 민족이다. 가깝게는 지난번 월드컵 4강 진출 때 보여준 열기가 그렇고 길게는 전쟁의 참화와 독재를 딛고 경제 기적과 민주화를 이룩해낸 것이 그렇다. 그런 국민이지만 정치 지도자 복은 정말 없는 것 같다. 정말 국민이 원하는 것, 한국이 필요로 하는 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인물은 어디 있는 것일까.
민 경 훈 논설위원
kyumi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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