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 애프터 투마로우’는 인류의 환경 훼손과 그로 인해 닥쳐오는 빙하시대를 다룬 공상과학 영화다. 이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빙하시대가 도래해 북미주 상당 지역이 꽁꽁 얼어붙자 미국인들이 자동차와 가재도구를 버리고 리오그란데 강을 넘어 멕시코로 탈출하는 장면이다. 미국 대통령도 멕시코로 도망가 그동안 미국이 저지른 잘못을 사과한다. 툭 하면 미국이 안고 있는 문제를 불법체류자의 책임으로 돌리고 이들을 규탄하는 미국인들에 대한 풍자를 엿볼 수 있다.
만약 실제로 극심한 한파가 몰아닥쳐 미국인들이 멕시코로 대거 밀입국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멕시코인들은 어떤 입장을 보일 것인가. 꽁꽁 얼어죽건 말건 그건 너희 사정이니까 우리는 알 바 없다. 멕시코는 법치주의 국가이므로 누구나 빠짐없이 줄을 서서 자기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라고 할 것인가. 죽은 다음에는 암만 기다려도 소용이 없다.
현재 미국이 당면하고 있는 불법체류자 문제를 일어나지도 않은 가상 세계와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않으며 천재지변으로 인한 긴급 피난과 경제적 지위향상을 위한 이주를 같이 볼 수 없다는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원하며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불가능하다고 느낄 때는 그 꿈의 실현이 가능한 신천지를 찾아 떠난다. 가까이는 한국을 떠나온 한인들이 그렇고 멀리는 제임스타운과 플리머스를 개척한 영국 이주자들, 더 길게 보면 베링 해협을 건너 미 대륙에 첫발을 디딘 인디언들이 그렇다.
혹자는 국가가 생기기 이전 무주공산에 발을 디딘 경우와 이민법이 엄연히 살아 있는 지금 몰래 국경을 넘어온 경우는 다르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영국 이주자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왔을 때 미국은 빈땅이 아니었다. 1848년 멕시코와 전쟁을 일으켜 캘리포니아주를 비롯한 서부 주들을 병합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현재 미국 경제는 불법체류자들의 값싼 노동이 없이는 굴러가기 힘들다. 청소, 농장 노동, 막일 등 소위 3D 업종은 아무리 광고를 내도 본토인들은 찾아오는 이들이 없다. 그러나 미국인들에게는 값싼 임금이지만 눈 덮인 산과 불타는 모래사막을 건너 미국에 온 라티노들에게는 작은 돈이 아니다. 중남미에서는 하루 종일 죽도록 일해야 하루 5달러 벌기가 어려운 데 이곳에서는 어떤 직종에서 일해도 그 몇 배를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LA타임스는 중남미에서 밀입국해 LA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라티노 가정을 소개한 적이 있다. 이 집 가장은 막노동에서 시작, 1986년 사면을 받은 후 작은 비즈니스를 인수하고 지금은 중산층의 삶을 누리고 있으며 5명의 자녀들은 동부의 명문대를 나와 이제는 상류사회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의 소식을 들은 중남미인들 가운데 나도 그와 같은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하는 사람이 하나둘이겠는가.
불법체류자는 물론 그를 돕거나 채용하는 사람까지 엄벌에 처하는 법안이 지금 연방 의회에서 심의중이라고 한다. 이 법안 지지자들은 미국은 대다수, 특히 공화당원들이 이를 원한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공화당은 정말 어리석은 당이다. 1994년 불법체류자에게서 각종 웰페어 혜택을 박탈하는 프로포지션 187을 내놨다가 가주에서 만년 소수당의 신세로 전락하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단 말인가.
아무리 사법 당국이 단속을 심하게 펼쳐도 ‘밥을 먹는 것을 금한다’는 법은 시행되지 못한다. 인간의 본성에 반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불법체류자 문제는 수요와 공급이 맞아 떨어져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 현실을 무시하는 어떤 법도 실효를 거둘 수 없으며 인도주의 정신에 어긋나는 부작용만 부를 뿐이다.
지난 주말 LA에서는 이민 악법에 반대하는 50만명 규모의 대대적인 시위가 열렸다. LA 역사상 최대라고 한다. 정치인들은 무엇이 진정 미국의 건국 이념과 이익에 부합하는 일인지 다시 한번 돌아보기 바란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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