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장 체크 인 서류에는 고객들의 동반자를 밝히는 난이 있다. 노스 타코다 주에서 온 스미스라는 70노인이 90세 된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내가 스미스에게 효자라고 칭찬했더니 자기가 효자가 아니라 그의 어머니가 빵을 구워준다는 핑계로 따라 다니는 과잉보호 어머니라 했다. 독일계 그의 어머니는 매일 빵을 구워 자식들에게 배급을 한단다.
“우리 시어머니도 90인데 내 남편이 서울가면 손수 음식을 해주시는데 동갑인 우리 엄마는 빵도 밥도 안 해주고 새벽마다 기도로 때운다니까. 이제 빵 구워 달라고 떼를 써야겠네”라고 행복한 투정을 하며 한바탕 웃었다.
내가 작은 풀꽃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은 유난히 꽃피는 4월을 좋아하시는 엄마 때문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4월이 이제 엄마에게 잔인한 달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4월이 되면 혈압도 오르고 소화불량증도 생겨서 식구들을 긴장시키는데 이 현상은 연세에 걸맞지 않게 예민한 엄마의 감성 때문이다.
내가 결혼 후 친정 갈 때마다 “왜 얼굴이 이래. 생글생글 웃지도 않고”라며 늘 해맑았던 처녀 때의 모습을 기대하시더니, 이젠 “셋째 니가 정말 환갑 진갑 다 지냈냐?”라며 예쁜 딸은 포기하신다. 그런데 아직도 내 재롱(?)만은 보고싶어 하신다.
엄마는 내가 세살 때부터 손님이 오시면 노래를 시켰는데 그때마다 나는 “새파란 하늘에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서 산도 그리고 물도 그리고...”라는 노래를 손 깍지를 끼고 발꿈치를 들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지금도 그런 재롱을 기대하신다는 말이다.
내 아들이 뉴욕에 살 때는 봄가을로 엄마를 뵈었었다. 그래서 꽃피는 봄에는 엄마와 동생이랑 꽃잎 흩날리는 델라웨어 강변을 새 신부처럼 꽃잎을 밝으며 거닐다가 강변 커피 샵에서 오색 낙화로 물든 강물을 바라보며 얘기꽃을 피우노라면 어느새 타임머신은 옛날로 돌아가 있었다. 그렇게 지나가다 어느 날 갑자기 혈압이 올라 올케와 같이 허둥지둥 엄마 주치의를 찾아가는 길에도 느닷없이 나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하셨다.
“엄마 나 노래 잘 못해, 가사를 기억하는 노래가 있어야지, 우리 테이프 듣자 응?” 그만 엄마의 표정이 어두워 지셨다.
“웃음 치료 음악치료 얼마나 좋은지 알아예? 지금 형님 노래가 약이라예”
올케가 더 부추겼다. 그래서 나는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장장 40분동안 동요에서부터 가곡 찬송가까지 손 무용을 하며 다 불렀다.
4월을 맞으니 그때 흐뭇해하시던 엄마 모습이 자꾸 어른거린다. 사람들은 기쁠 때나 슬플 때, 그리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사랑하는 이들이 더 그리워진다. 서서히 이곳에 들꽃들의 축제가 시작되는걸 보니 동부 엄마 집 뜰에도 수선화 튤립 개나리 목련 라일락 철쭉들이 차례로 피고 지고 덕우드 꽃까지 만발하겠지!
아무리 인간의 수명이 길어져도 70대 80대가 되면 의, 식, 주에 대해 처연해지고 아쉬운 게 없어진다. 노부모 님들은 자식들 얼굴 볼 때와 사랑하는 이들을 만날 때가 가장 즐거운 순간들일 것이다. 미국인들도 동서사방 흩어져있던 형제들이 노부모를 모시거나, 부모가 예약을 해놓고 자식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해서 캠핑을 즐기는데 그들이 정말 행복해 보였다.
이제 서울에 계시는 시어머니께 일년에 한번씩이라도, 둘이 못가면, 칠순 아들의 얼굴이라도 꼭 보여드려야겠다. 지난번 우리 뒷산에 눈이 왔을 때 마흔이 다 되가는 아들이 제가 스노우 보드 타는 것을 보라고 연신 엄마를 불러 대고, 나는 아들의 첫걸음 재롱을 보듯이 손뼉 치며 좋아했다. 엄마 앞에서는 몇 살이든 ‘가시내’가 되는 나, 그 딸에 그 아들이다.
“엄마, 이번 4월에는 내 아들의 엄마 노릇 하러 일본 가야해요”
늘 이해하고, 양보하며 참고 사는 게 엄마들이니까 엄마는 이 글도 “엄마 앞에서 짝짜꿍” 재롱으로 봐주시리라 믿는다.
이성호 시인·RV 리조트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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