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에 가서 들은 소식들 중에 죽음이 있었다. 아니, 죽음들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만나지는 못하지만 어디에선가 잘 살고 있겠지, 하던 여학교 시절의 몇 동창이 그 사이 타계했다는 것이다. 죽음이 참으로 멀지 않은 곳에서 배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나는 지난해에 가까웠던 한 친구를 잃었다. 한국에 나갔을 때 입원해 있는 그 친구와 통화를 했었다. 한사코 병원으로 오지 말라고 친구는 말했다. 건강하던 모습의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슬픈 목소리로 부탁했다. 우리는 함께 즐거웠던 시간들을 추억하면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그리고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병이나 고통이 없는 나라에서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돌아온 후에 나는 다시 전화를 하지 않았다. 2년에 한번 정도 우리가 만났을 때 친구는 언제나 우아한 레스토랑을 원했고 그녀는 참으로 멋진 차림으로 나타나곤 했었다. 그동안 집을 어떻게 증축했다던가, 어디 어디로 외유를 했다던가, 사위가 우수한 논문을 써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던가, 한결같이 그녀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들로 그녀의 인생은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주위 친구들에게는 눈치가 보여 자랑하지 못하던 얘기들을 외국에서 방문중인 나에게는 부담 없이 말할 수 있어 참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자기 인생에 대한 자부심과 높은 만족도에 박수를 보내주었다. 죽음 같은 것은 먼 훗날에나 생각해 볼 사항이었다. 그런데 이제 남은 것은 내 기억 속에서 아직은 선명하지만 차차 희미해질 그 친구의 자신에 넘치던 모습뿐이다.
중세기적 바그다드에 한 부유한 상인이 살았다. 어느 날 하인을 시켜 장에 가서 일용품들을 사오게 했다. 얼마 후에 하인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되돌아와서 말했다. 주인님, 주인님, 시장에서 누군가 나를 밀쳐서 쳐다보았더니, 글쎄 그게 죽음이지 뭡니까 나한테 위협적인 몸짓을 보이기에 너무 무서워서 도망쳐 왔어요. 제발 제게 말을 빌려주십시오. 당장 바그다드를 떠나 사마라로 가겠어요. 사마라에까지는 죽음이 나를 찾아오지 못할 테니까요.
하인이 급히 떠난 후 주인이 시장에 갔다. 아니나 다를까. 죽음이 시장바닥에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주인이 죽음에게 따졌다. 왜 나의 하인을 위협하여 장도 못 보게 했는가. 죽음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당신 하인을 아까 여기서 보고 좀 놀랐거든. 그 자와는 오늘 저녁 사마라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잡혀 있는데 말이야.
영국의 저명한 작가 서머셋 모엄의 히곡 ‘쒜피’의 서론에 나오는 아라비아의 전설이다. 사마라로 도망친다고 누가 죽음을 피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임종을 앞두고 있을 때 그의 제자들이 여쭈었다. 스승님의 ‘다이어로그즈’를 돌아가시기 전에 좀 요약해 주십시오. ‘다이어로그즈’는 플라톤 전 생애의 인생 철학관을 대화 형식으로 서술한 15권의 책을 묶은 방대한 수록이다.
플라톤은 한참 생각한 후에 간단 명료하게 답해 주었다. 죽는 연습. 이보다 더한 함축미를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태어나서 자라고 배우고 일하다가 질병과 늙음에 의해서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시점을 죽음이라고 한다면 산다는 것 자체가 죽기 위한 연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잘 살기 위해서 잘 사는 것과 잘 죽기 위해서 잘 사는 것은 동일한 말인데 역설적으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인간살이에서 죽음처럼 평등공평한 일이 또 있는가. 부자도 빈자도 성인도 도둑도 미인도 추인도 딱 한번 경험하는 일. 그리고 누구도 되돌아와서 어떻더라고 얘기해 줄 수 없는 일. 막강한 권력이나 재력도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순간. 그 순간을 위한 연습을 잘하는 것이 정말로 잘 사는 일이 아닐까. 그렇지 않을까.
아름다운 이 사월 아침에 죽는 연습에 관해 생각해 본다. 어떻게 살면 연습을 잘하는 것일까.
송정원 베벌리힐스 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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