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기던 교회마다 도서비가 책정되어 매달 지급되었기 때문에 신간 서적을 그때 그때마다 구입하여 읽고 쌓아둔 책이 재산이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사무엘 베켓이 쓴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다시 읽었다. 고독과 허무에 빠진 두 사람 볼라디미르와 에스트아공이 주인공이다. 이 두 사람은 고목 나무 하나가 서있는 한 시골집에서 ‘고도’라는 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g o d o t 라는 신은 아마도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아리송한 기다림 속에서 두 사람은 허무에 가득 찬 넋두리를 주고받는다.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반복하지만 그 속에는 사실 비참함이 짙게 깔려있다.
목적도 의미도 없는 이야기가 진행되고 희극과 비극이 뒤범벅이 된 아리송한 대화로써 계속 되다가 그냥 끝나버리고 만다. 물론 ‘고도’는 오지 아니했고 그리고 둘은 해결한 아무 것도 없었다.
얼핏 보면 엉터리 같은 이 작품이 196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이 되고 불란서에서 만도 300회 이상의 연속 상연을 가진 바 있으며 세계는 물론 한국에서도 연극 무대에 여러 차례 올려졌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지 그러하지 아니한지 확실하지 아니한 모양이라 또렷하게 분간하기 어려운 기다림과 대화로 끝나버린 이 작품이 왜 이상스럽게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가져다주었을까. 목적도 해결도 없는 이 연극 속에 매혹되어 버렸을까, 그리고 노벨상까지 받게 되었을까.
어째서인가 한참을 생각해보아도 여전히 남은 결론은 바로 ‘기다림’ 같다. 아니 분명히 ‘기다림’이다. 그 ‘기다림’ 때문이었다. 기다림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기다림은 곧 희망이다.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추위에 떠는 배고프고 헐벗은 나그네들,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기를 기다리던 이상화 같은 시인, 병상에 누워있는 그이가 낫기를 기다리는 연인들, 전쟁터로 떠난 아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어머니…
‘고도를 기다리며’에 나오는 주인공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당신과 나’였다는 이유 때문에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지 않았을까.
기다림! 기다림! 오지 않아도, 아니 오지 않을 줄 뻔히 알면서도 포기할 수 없어 기다리는 고독한 기다리는 사람들! 그 속에서 현대인은 자기를 보기 때문에 또 얼마나 비참한 모습인가를 발견하기 때문에 그 작품은 충격이 아니었을까.
박석규/은퇴 목사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