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에 들어서면서 “내가 더 이상 젊지 않구나” 깨닫게 하는 일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은 비단 나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매년 새롭게 입학하는 대학 신입생들은 늘 같은 나이인데도 어느 날 갑자기 “쟤네들이 언제 저렇게 어려져버렸지”라고 새삼 놀란다든지, 호기심 가득 차 최신형을 쫓아다니던 전자제품들이 언제부턴가 만지기조차 두려운 대상으로 바뀌고, 뿌옇게 보이는 신문 활자들이 당황스러우면서도 아닌 척 팔을 뻗어가며 읽으려고 버텨보다가 결국 돋보기를 맞추러 가야만 했던 날, 아이들이 핀잔 반 걱정 반으로 내게 하는 말을 들으며 “너희들도 늙어봐라, 그거 엄마가 예전에 울엄마한테 똑같이 했던 말이다”고 하는 횟수가 늘어가는 거 하며 그저 젊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들 예쁜지…
어디 그뿐이랴,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답답한 운전솜씨도 어느새 짜증스럽기보다는 걱정스러워지고, 밝고 씩씩한 젊은이들보다는 곱고 건강하게 나이 드신 할머니들에게 더 눈길이 가고, 신경에 거슬리던 잔주름들이 어느덧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며 정겨워지기까지 한다. 나를 젊지 않다고 느끼게 하는 것들…
한치 앞을 알수 없지만 갈 날이 아직 그리 가깝지는 않은 것 같은데 이 나이에 늘어놓기 시작한 리스트가 끝이 나지를 않는다. 태어난 순간, 만들어진 그 순간 이후로는 어느 것도 더 이상은 새 것일 수가 없고, 마냥 자라고 계속 젊기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니 젊은 기세가 꺾여 방향이 바뀔 수밖에 없음을 뻔히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앞으로 정도가 더욱 심해질텐데 좀 더 의연해질 수 없을까 생각하는 순간 펼치면 먼지만 푹푹 날리는 오래된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놓을 자리도 부족해 빨리 치워버리고만 싶은 책들이었는데 오늘따라 왠지 정겹고 의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아마 내 마음이 그렇게 보고 싶었던 것이리라.
책의 생명은 우선적으로는 얼마나 잘 이용되느냐에 달려 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감동을 안겨주기도 하고 생각과 지식을 전하기도 하며 어떤 이는 자신의 출판물에서 혹은 입으로 그 내용과 함께 자신의 의견, 느낌 등을 전할 것이다. 책을 빌어 표현된 한 저자의 지식이 새로운 지식을 잉태시키고 지식 세계를 살찌워 나가는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탄생한 새로운 정보나 지식의 보급을 위해 또 다른 저작물이 만들어지게 되고 이 또한 같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책 본문내의 참조, 인용 등과 도서목록을 잘 살펴보면 책들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는지가 잘 나타나있다. 글의 참조나 인용을 보면 남에게서 빌려온 정보, 지식의 출처를 알 수 있고, 도서 목록에서는 각 자료의 내용과 형태의 독특한 성격이 상세히 기술되어있어 자료들을 서로 잘 구별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자료간의 상호 관계 또한 잘 엿볼 수 있게 한다. 어느 책의 개정판이나 번역본인지, 부록인지, 어느 소설을 영화화했는지, 어느 영화나 프로그램을 비디오로 만든 건지 또는 디지털화 한 건지, 혹은 어느 작품의 평론인지 등등이다.
오래된 만큼 많이 이용된 책의 모양새는 마모되기 마련이지만 그 영향력은 이미 어디에선가 충분히 발휘되어 이처럼 그 산물의 증거나 흔적들을 찾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오래되어 먼지나 날리며 잊혀졌다한들, 또 겉모습이 형편없어졌다한들 그다지 신경 쓸 일 아니다는 의연한 눈으로 보게 되나보다.
문득 ‘책이라는 무생물이 그러한데 하물며 살아 움직이는 우리들은…’하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사는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무언가를 만들어 함께 나누며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나도 지금까지 그래 왔을 거라 생각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믿고 싶다. 그래, 나도 세상에 해 놓고 가는 일이 세월만큼 가득일 수 있게 말이다. 마더 테러사님처럼 아름답고 성스러운 주름살로 늙어가기는 어렵겠지만 최소한 나의 나이테에 대해 즐겁고 당당하게 얘기하며 살 수는 있을 것 같다.
김선윤 USC 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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