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나라를 찾아 원양 어선을 탔던 한인 청년이 미국에서 30년간의 온갖 고생 끝에 매릴랜드 주에 대규모 닭 농장과 147 에이커 규모의 바다 갯벌을 매입하고 ‘한국 형 아미시 마을’을 세우려는 청사진을 갖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필라에서 30년 동안 그로서리와 세탁소 등을 운영하다가 병 이름도 모르는 근육 마비 증세로 죽을 고비를 넘겼던 제만석(58 제스 팜 대표)씨는 4년 전 매릴랜드 주 샐리스베리에서 대형 닭 농장을 운영하다가 이제는 바다로 눈을 돌려 매릴랜드 주 남단 남버리에 굴 양식장을 위한 갯벌을 사들여 청년 시절 몸담았던 해양 산업 개척에 나서고 있다. 신천지 개척의 파이오니어로 부각되고 있는 제만석 씨의 인생 도전을 두 차례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 주>
경남 남해에서 5남 4녀 집안의 막내로 태어난 제만석 씨는 어릴 적 어머니가 식사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워낙 식구들이 많다보니 어머니는 늘 챙겨주기만 했지 본인 것은 차지할 수가 없었다. 제만석 씨는 6살 때 동네 교회에 나가 미국에서 보내온 구제품을 받아 어머니에
게 갖다 주었지만 역시 본인은 먹지를 않고 식구들에게 나눠주었다. 제 씨는 이 때 부자 나라인 미국에서 성공해 어머니를 배불리 먹여 들여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자 미국에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길을 찾다가 월남전에 참전하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1972년 해병대에 자원, 월남 땅에서 싸웠다. 그러나 제대할 때까지 방법을 찾지 못하다가 결국 원양어선을 탔다. 그는 1976년 뉴 올리온즈에 도착하자마자 미국 땅으로 잠적했다. 꿈을 찾아 소위 ‘불법 체류 자’로 전락한 것이다.
어릴 적 구제품을 주었던 꿈의 나라 미국은 불법 체류 자 제만석 씨에게 더 이상 희망이 아니었다. 하루하루의 불안감과 막 일에 시달리던 제 씨는 동향 출신으로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아 모든 고향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던 김선운 목사(헌팅턴 밸리 한인 장로 교회)가 필라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는 기억을 되살려 필라로 찾아왔다. 이때부터 제만석 씨는 생활에 안정을 찾아 최장복 씨와 결혼하고 3년 만에 영주권을 획득했다.
그는 그로서리를 하면서 교회 생활에 적극 헌신해 40대에 장로가 됐다. 또 세탁업으로 전업해 직원 37명을 고용하면서 40개 소규모 세탁소로부터 홀 세일을 받아 처리하는 등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그는 어느 정도 생활의 여유를 찾자 어머니에 대한 아픈 추억을 잊지 않고 1990년대
후반 필라에 불우 노인을 위한 ‘섬김의 집‘을 세웠다. 작은 2층 주택을 개조해 형편이 어려운 노인을 모시고 봉양했다. 최초 한인 양로원 격인 ‘섬김의 집‘은 연방 정부에도 등록하면서 운영됐으나 결국 봉사자들이 부족해 문을 닫고 말았다.
<홍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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