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 안 깊숙이, 고기 진열대 바로 뒤에 널평상(-平床)만한 나무도마가 있다. 한가할 때면 나는 이 도마 앞으로 의자를 갖다놓고 앉아 하루 일을 생각하거나 하루 일을 돌아보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 따라 손에 와 닿는 나무도마의 느낌이 유난히 차다. 평일보다 더 많이 고기를 썰거나 자르는 주말이면 나무도마는 새로운 칼자국과 검붉은 선지피로 도배 당하는데 이 때 나무도마의 느낌은 정말 차갑고 어떤 때는 섬뜩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다른 날 같으면 하루 지나면서 나무도마는 제 체온을 되찾는데 오늘은 다르다. 아직도 어제의 느낌 그대로다. 새로 생긴 칼자국에 생피가 배어서 일까. 어제 저녁 늦게 갑자기 손님이 몰려들어와 고기를 찾는 통에 고기 담당 종업원을 돕는다고 다가와서는, 웬만한 망치보다 더 무거운 뼈 절단용 칼을 머리 위로 번쩍 쳐들어 내리친다는 것이, 그만 빗나가며 중지 끝을 스치고 나가 지금까지 생긴 그 어떤 것들보다 더 크고 깊은 커다란 칼자국을 만들었다.
나무도마는 20년도 훨씬 넘게 칼을 받아왔다. 셀 수도 없이 많은 크고 작은 칼자국들이 가로세로 교차하며 이리저리 어지럽게 겹치고 겹쳐, 어떤 것은 깊이 그리고 어떤 것은 얕게 음각(陰刻)되어, 바라보면 먼 옛날 어느 나무부족의 불가해한 지사(指事)들로 뒤덮인 목판같이 되어버린 나무도마. 그 나무도마 속으로 흘러 들어간 나의 피 몇 방울이 도마를 얼어붙게 한 모양이다.
나는 천천히 천천히 나무도마를 손바닥으로 짚어본다. 칼자국을 따라 나가면서 칼의 종류와 칼날의 날카로움을 그려보고 또 칼을 움켜쥔 손과 툭- 불거진 손목의 힘줄을 바라본다. 나무도마 위의 어느 한 부분은 무수한 칼들이 수도 없이 내려 찍혀 칼자국 자체가 형체도 없이 지워진 곳도 있다. 이것은 상처인가? 아니면 나무도마 본래의 모습 중의 하나인가?
나는 다섯 손가락을 모두 이용하여 그 곳을 만져본다. 그 속으로 얼마나 많은 피가 배어들었을까. 피가 많이 배인 곳의 표면은 손가락 끝으로 와 닿는 느낌이 다르다. 부석부석하다. 그 곳에다 칼날을 세워 밀면 힘들이지 않아도 나무의 표면이 가루가 되어 쉽게 밀려난다.
나무도마 위에는 칼자국이 아주 희미하게 남아있는 것도 있다. 그것들은 아마도 10년 20년 전의 상처가 아닌가 싶다. 희미하기는 하지만 나무도마에 뿌리로 박혀 있는 저 옛 상처들. 그 것들을 들춰낼 수만 있다면 수많은 칼자국들의 언외(言外)를 해독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맨 처음, 나무도마를 내리치며 획- 한 획을 긋고 지나간 칼이 남긴 서늘한 상처는 어느 것일까. 그 상처가 제 몸 속 깊이 각인되는 순간 나무도마는 퉁-하는 울음소리를 내며 전신을 떨었을 테고 그 울음이, 그 떨림이 허공을 지나 자신을 도마로 만든 그 목재소의 뒷마당에 산처럼 쌓여있던 원목들을 뒤흔들었을 테고 그 원목의 흔들림이 원시림 속 깊이 하늘을 우러러 서있는 나무들에게까지 전달되었을 것이다.
숲을 떠나 화택(火宅)으로 들어서는 것들은 무엇이나 상처를 입는다. 서로 상처를 주면서 상처를 받는다. 화엄 속에서 가시에 긁히고 칼에 찔리고 발끝에 채여 크고 작은 상처 하나 둘씩 가슴에 품게 된다. 그 상처를 죽을 때까지 상처로 갖고 가는 것들이 있고 하늘의 별처럼 보석으로 만드는 것들도 있다.
이제 나무도마는 칼의 흉터, 칼의 흔적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제 스스로 상처가 되어가고 있다. 상처를 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 자신이 상처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나무도마의 길이다. 나무도마가 완전한 ‘상처덩이’가 될 때 나무도마는 더 이상 나무도마가 아닐 것이다.
나의 나무도마는 아직 ‘상처덩이’는 아니다. 나의 나무도마는 앞으로도 몇 년, 아니 몇 십년 더 칼날을 받을 것이다. 칼날을 받아 ‘상처덩이’가 되어가면서 가물한 기억 속으로 희미하게 사라지는 최초의 자신을 언뜻 언뜻 떠올릴 것이다.나는 지금 그 과정의 한 순간을 보고 있다.
이윤홍 시인·자영업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