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여 살아도 따습지 않고/ 부비며 지내도 허허한 마음/하늘 휘저으며 몸부림 쳐도/잊혀지지 않는 강산아/훌훌 갈꽃으로 날아가도 /바람에 부딪치는 망향〉
이민 초기에 쓴 ‘캘리포니아 갈대’라는 내 시의 첫 연이다.
나는 33년 전 샌타모니카 해변이 가까운 웨스트 LA에서 첫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걸핏하면 먼저 이민 온 식구들을 동원해서 샌타모니카에서 말리부 비치까지 드라이브를 했었다.
이민 온 첫해 추석 무렵이었다. 그리움인지 후회인지 모를 질척한 감성이 엄습해와 도저히 집안에 박혀 있을 수 없어서 애들을 동생들에게 맡기고 남편과 단 둘이 새로 산 대형 LTD를 타고 그 바다로 달려갔었다.
그때 내 눈 앞 산기슭에 탐스럽게 핀 갈대들이 텅 빈 쪽빛 바다와 하늘을 휘젓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며 내 속에서 질척이는 것들을 모두 토해내고 말았다.
그 갈대는 내가 전에 좋아했던 연약한 갈대가 아니라 거대한 이 캘리포니아와 잘 어울리는 개선장군 투구에 펄럭이는 벼슬 같은 탐스런 갈대였다. 땅이 흔들려도 어떤 비바람에도 꺾이지 않을 당당한 자세였다.
그 갈대는 고향 땅에 깊이 뿌리 박혔던 내 삶을 뽑아다가 낯선 땅에 옮겨 심으며 힘겹게 새 사름을 시작한 나에게 강한 교훈이 되기도 했다. 그때 갈대를 보며 내 인생의 가을을 풍요하게 피우리라 다짐했었다.
매년 가을이 되면 갈대밭을 찾아다니며 ‘갈대’ 시를 쓰다가 결국 나의 첫 시집 제목도 ‘캘리포니아 갈대’가 되고 말았다. 그 시집 때문에 갈대가 피면 내가 생각난다는 친구들도 있고 독자들도 많아서 나는 절로 갈대시인이 되고 말았다.
나도 갈대를 보며 내 시를 떠올릴 그들을 생각하게 되고 특히 나의 두번째 시집 출판기념일에 집 앞에 핀 그 억센 갈대를 모두 꺾어 항아리에 꽂아주셨던 오천란 권사님도 뵙고 싶다.
나는 그렇게 갈대를 좋아하면서도 우리 정원에는 심지 않았는데 이 산장에 와서는 갈대부터 심었다. 지난여름 정성껏 물을 줘도 뜨거운 바람에 몸부림치며 서걱서걱 신음하던 갈대가 어느 날 임신부처럼 통통해지더니 8월 들면서 병아리 솜털로 뽀얗게 살이 올라 풍만한 꽃으로 산장 입구를 장식하고 있다.
소슬바람에 일렁이며 환영의 손짓도 잘 가시라는 인사도 하며 세상근심 모두 털어 내고 공해에 절은 해와 달의 얼굴을 닦고 있다. 그 갈대 앞에 서면 30대에 황량한 이 사막에 터 닦고 여름을 잘 견뎌온 내 인생여정의 가을을 축하해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지금 하이웨이 1번 해변이나 멀홀랜드 하이웨이를 거쳐 라스 버지네스 길을 따라 말리부까지 드라이브만 해도 살아있는 행복을 느끼며 감사하게 될 것이다.
떠나온 세월이 아득해도 추석 즈음 갈대를 보면 바람결에 퉁소소리처럼 좋은 고향소식이 들려왔었는데 이제 그 애틋한 그리움마저 사라져가고 있어 안타깝다.
그 바다를 보면 철없고 서툴고 위험스런 정권 때문에 투전꾼이 되어버린 야윈 얼굴들이 어른거리고, 개도 짖기 전에 돌보는 요즈음 국민들이 울부짖을 때는 딴청 부려놓고 짖지 않았다며 국민들을 개로 비유하는 대통령을 둔 나라, 부칠 곳 없이 방황하는 민심들, 듣고 싶지 않은 것들을 꽃으로 훌훌 날려보내는 갈대 앞에서 나도 고개 저으며 모두 털어 내고 있다.
〈까닭 모를 너의 인내를/ 그 여름을 보내고야 알았다/ 속 채우는 갈꽃의 꿈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인 것을/ 바람에 날 세운 잎새의 몸부림이 / 넉넉한 꽃이 되어/ 먹구름 쓸어내니/ 가이없던 하늘이 다가온다/ 기다림 없이/ 때를 채우지 못하는 것들이/ 어찌 필 수 있으랴/ 이제/ 이 가을 모두 너의 것이니〉
우리 갈대에게 주는 선물이다.
이성호 시인·RV 리조트 경영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