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수 / 편집국장
■한국의 축구해설가 신문선 씨가 자주 도마위에 오르는 이유가 있다. 쉽게 해도 될 말을 굳이 어렵게 하고 이른바 말설사가 심하다는 것이다. 사례 하나, 97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98프랑스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전 한국-일본전 때의 일이다. 최전방 공격수 김도훈 선수가 동료의 찔러주기 패스로 얻은 단독챈스에 헛발질을 했다. 신 씨의 따발총 해설은 이랬다. “저렇게 하면 말이죠, 스포츠 심리학적으로 말씀드리면 말이죠, 동료들의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것, 바로 그것이거거든요. 그 숨넘어가는 실황중계 와중에 얼른 이해하기 쉽게 그냥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이라면 될 것을 스포츠 심리학이 어떻고 한 해설(?)에 쓴웃음을 지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중앙일보 20일자 <취재수첩> ‘집단기억, 허와 실’을 읽은 뒤에 남는 개인기억(개인적 느낌)은 한마디로 “쉬운 말을 참 어렵게 했으나 역시 공허하다”는 것이다. 중앙일보가 중앙일보 13일자 “수재의연금 늑장처리 물의 기사”를 의혹제기가 아니라고 극구 주장하는 걸 보면, 진실로 그렇게 믿는지 자존심이나 자사이기주의 등 다른 이유 때문에 아닌 줄 알면서도 그렇게 주장하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혹시 그 기사를 제대로 안읽은 것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 지경이다. 다시 읽어보라. 한국일보 기사라 생각하고 읽어보라. 중앙일보 기자가 취재과정에서 도대체 뭐라고 했길래 그 기사가 나간 13일 아침 다른 일-해군함대 환영회 초청건-로 통화할 때만 해도 기사에 대한 불만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던 김홍익 회장이 그날 오후 “의혹이 뭐야? 늦었다는 기준이 뭐야?” 등등 격렬하게 항의했는지 생각해보라. 중앙일보가 해마다 되풀이되는 의연금 처리의 원칙을 세워보자는 뜻에서 문제제기를 한 듯이 주장하는 것, 그 기사에 의혹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으니 의혹제기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 또한 상식과 양식을 동시에 의심케 한다. 손가락이 달에 닿아야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다고 하는가.
■말이든 글이든 <반드시 참되고> <되도록 쉬워야> 한다. 시시비비를 가릴 때 쓰는 말(글)은 더욱 그래야 한다. 진실(하다는 믿음)이 없는 말(글)은 시비규명을 어지럽게 한다. 공연히 난해한 말(글)은 시비규명을 지연시킨다. 중앙일보 취재수첩에서 장황하게 거론된 집단기억 얘기는 시비를 가리는(규명) 용도가 아니라 흐리는 용도로 악용된 측면이 짙다. 게다가 한인회 등 반발을 집단기억의 악순환(역기능)-일종의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과잉반응-쯤으로 몰아가려는 혐의까지 엿보인다. 한인사회에 실로 큰 물의를 일으켰고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대형비리 및 의혹들에 대해 “본보(중앙일보)가 보도해야 할 사안들을 보도하지 않았다고 느꼈던 자신들(한국일보)의 집단기억”에 근거하고 있다고, 짐짓 먼 과거나 딴 나라 얘기하듯 선을 그은 것은 유감이다. 그러면 본보에서 거듭 제기돼 이제는 낯설지 않을 그런 사안들(인물들)에 대한 중앙일보의 집단기억은 무엇인가. 남들의 집단기억을 거론하려면 자신들의 집단기억도 말해야 공평한 것 아닌가. 혹시 집단망각(기억상실)에 빠진 것인가. 아니면 혹세무민(惑世誣民, 교묘한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을 헷갈리게 해서 속임)을 위해 끌어들인 말인가.
■중앙일보 취재수첩에 실망만 한 것은 아니다. 소속사 울타리를 넘어 중앙일보 표현대로 ‘따로 또 같이’ 공동선을 추구할 수 있으리란 희망의 근거들도 발견했다. 개인적 친소관계를 접고 신랄하게 진행된 이번 논쟁에서 거둔 알토란 같은 수확은 이것이다. 희망이 희망사항에 그치지 않게 하는 것, 역시 실천이다.
tsje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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