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피셔는 남성과 여성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며 그 이유는 뇌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과학적 연구에 근거를 둔 주장을 펴 관심을 모으고 있는 여성 인류학자이다. 피셔는 그런 차이의 하나로 좌우의 뇌를 연결하는 조직들의 경우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 굵고 크다고 밝히고 있다. 이 때문에 남성들은 한 가지 일에 초점을 맞추는 ‘계단식 사고’를, 여성들은 서로 관련 있는 요소들을 통합해 생각하는 ‘거미집 사고’를 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는 것이 피셔의 이론이다. 결론적으로 피셔가 강조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위험한 야수들을 뒤쫓아야 했던 시절에는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계단식 사고가 유리했지만 현재와 미래의 산업구조 아래서는 거미집 사고가 훨씬 우월하다”는 점이다.
피셔 주장의 타당성을 검증하기는 쉽지 않지만 최근의 사회적 추세로 볼 때 그녀의 주장이 점차 힘을 얻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지난 1949년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성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개탄했지만 세상은 급속히 변하고 있다. 이제 여성들도 태어날 때의 능력을 유감없이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21세기를 ‘핑크칼러’의 시대니 뭐니 하며 떠드는 것은 이런 시대적 흐름을 거스를 수 없음을 눈치 챈 남성학자들이 만들어낸 쑥스러운 수식어에 지나지 않는다. 보부아르의 개탄이 푸념 취급을 받게 될 날도 머지않아 보인다.
여성들과 남성들간의 사회지배구조는 평등을 향해 급속히 개선되고 있으며 일부 분야에서는 역전 현상까지 보이고 있다. 의대와 법대 대학원 진학에서 여학생들이 남학생들을 넘어 선지는 오래됐다. 이에 따라 전문직 여성 진출 비율이 급속히 높아지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남성들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대기업 CEO에 올라 거대 상단을 이끄는 여걸들도 적지 않다.
어디 주류사회 뿐인가. 한인사회야 말로 여성들의 파워와 관련해 21세기적인 특징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커뮤니티다. 지난번 센서스에서 한인여성들의 비즈니스 소유율이 전체 이민자 커뮤니티 가운데 두 번째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센서스 결과는 굳이 다운타운에 가보지 않고 주변을 한번만 둘러 봐도 금방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이민자들에게 새로운 세계는 기회를 제공하지만 동시에 인내와 땀을 요구한다. 환경 적응력에서는 남성이 여성을 따라 갈 수 없는 법. 한인사회 성장동력으로서의 여성 역할은 날로 커지고 있다. 27일 민 김씨가 나라은행의 새 행장으로 확정된 것은 그런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첫 한인 여성행장의 탄생은 이제 한인 여성들의 힘이 ‘규모의 우먼파워’에서 ‘범위의 우먼파워’로 까지 서서히 확대돼 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러나 제비 한 마리가 왔다고 봄이 온 것은 아니다. 남녀 역할과 관련한 21세기적인 변화는 ‘완성형’이 아니라 이제 갓 걸음마를 시작한 초기단계의 ‘진행형’이다. 여성 행장 탄생이 더 이상 큰 뉴스거리로 취급되지 않을 때가 와야 진정한 변화의 궤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문제에 관해 많은 글을 써 와 여성단체들로부터 상도 받은 동물학자 최재천 교수는 “21세기가 여성의 세기가 되리라는 것은 당위성의 문제가 아니라 생물학적인 필연성의 문제”라고 까지 단언한다.
이런 변화 속에서 걱정되는 것은 시대적 흐름에 막연한 거부감을 갖거나 과거의 우월주의적 의식의 미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부 남성들이다. 이런 생각을 고집하면 거미집 사고를 하는 여성들의 거미줄에 걸려 혼구멍이 날 각오를 해야 한다. 당신의 사고 모드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에서 “암탉이 울면 알을 낳는다”로 바뀌지 않는 한 좁게는 이민사회의, 그리고 넓게는 21세기의 성원으로서 살아가는데 적지 않은 애로를 겪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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