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형란
“Tombe la neige. Tu ne viendras pas ce soir .Tombe la neige. Et mon coeur s’habille de noir…”
이십여년 전, 해마다 이맘때 쯤 겨울날 하나 둘 오색 찬란한 불빛이 켜지기 시작하고 어두운 잿빛 하늘에서 하얀 눈이 퍼붓는 날이면 ‘눈이 내리네’로도 잘 알려진 이 샹송이 라디오에서 자주 나왔고, 이 노래는 늘 나의 마음에 어떤 아련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고는 했다.
여고시절, 노총각 불어 선생님은 다소 감상적이면서 여자의 모성 본능을 자극하는 분이었는데, 내 취향이 아니라서 나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그 선생님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참 많았었다. 비가 부슬 부슬 내리는 날이나 겨울에 기다리던 하얀 첫 눈이 내리면, 늘 샹송을 틀어주고 불어 수업 대신 노래 가사로 공부를 시켜, 죠르쥬 무스타키의 ‘너무 늦었어요’ 라든가, ‘사랑의 기쁨’, ‘쉘부르의 우산’ 등… 나는 그때 샹송을 참 많이 접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거리의 버스 정류장 근처에 있는 음반가게에서 이 노래가 흘러 나오면 나는 우두커니 서서 눈 내리는 거리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노래가 끝날 때까지 버스들을 그냥 보내고는 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떠나간 연인은 오지 않는 저녁에 하얀 눈만 내린다는 이 노래는 그렇게 나의 마음에 남았는지, 세월이 지나 겨울에 눈이 오지 않는 지금 내가 사는 이곳에서도 가끔 생각이 난다.
스무살 겨울날, 방에 틀어 박혀 읽었던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 가운데’ , 사는 게 버겁다고 느껴질 때마다 듣곤 했던 ‘남 몰래 흐르는 눈물’ 같은 가슴 저리는 오페라 아리아나 하드락 그룹 ‘Rainbow’의 기타 연주곡들, 대학 졸업반 때 내가 2년 동안 속으로만 좋아했던 과친구가 군대가면서 너를 사랑했다며 나에게 주고간 그의 시집 ‘불 하나 속’, 친구와 함께 보았던 뮤지컬 ‘지붕위의 바이올린’ 마지막에 흐르던 ‘Sun rise, Sun set’에 눈물 흘렸던 스물 여섯살의 겨울… 많은 사연들이 세월과 함께 빛이 바래지고 먼지가 쌓여 희미해졌어도, 내가 지나왔던 생의 어느 시점은 내가 한 때나마 매료되었던 한 곡의 노래로, 책이나 시, 한편의 연극으로 그렇게 나의 기억에 남겨져있다. 삶의 아름다운 것들 만을 사랑하려 들었던 그 시절, 그 때마다 다른 빛깔로 꾸었던 나의 꿈들과 함께…
신경숙의 자전적 소설이라 할 수 있는 ‘외딴방’은 그녀가 전자산업 공단에서 근무하며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는 현실에서 글을 쓰는 작가의 꿈을 꾸며 영등포에 있는 비좁은 외딴방에서 지냈던 4년간의 시절을 그리고 있다. 그 시절을 처음부터 이야기 하지 못했던 이유는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그 시간들이 너무 아파서 쓰지 못했다 한다.
힘겨웠던 과거 시간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것은 흐르는 강의 세찬 물살을 폭포를 거꾸로 거슬러 떠나온 곳으로 되돌아가며 살갗이 찢기는 연어처럼 아픈 거라고 작가는 말한다.
이 소설이 요즘 나의 마음을 붙잡고 놓아 주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나는 나의 상처들을 지금은 사랑하는가? 미워했던 사람들을 지금은 사랑하는가? 아름다운 날개를 달고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 오르는 나비가 되는 꿈을 꾸는 푸른 애벌레처럼 하루 하루 견뎌 냈던 외로운 누에고치의 나날들을, 벗어나고 싶었던 나의 외딴방을 지금은 사랑하는가? 아름다운 장미의 날카로운 가시도 나는 사랑하는가?
지나온 시간들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어쩌면 떠나온 곳에서 멀리 흘러온 세월 만큼이나 오래 걸리고 더 힘겨울지 모른다. 살갗이 찢겨도 거친 폭포를 올라 뛰는 은빛 연어처럼 그렇게 나도 떠나고 싶었던 곳으로 다시 되돌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너무 늦어 버리기 전에… 그리움이었다고…이 모든 것이 다 사랑이었다고…언젠가 나는 말할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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