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 중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학생이 있다. 아무리 주의를 줘도 연주를 시작하기만 하면 이내 100미터 달리기 선수로 돌변한다. 쉼표를 무시하고, 쉼 없이 연주하는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입버릇처럼 말한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Don’t rush!!”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아노 건반 위에서 손가락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날아다니며 힘차게 두드리는 것이 훌륭한 연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음악을 모르는 이야기다.
악보를 단 1초만 살펴보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은, 악보는 음표(note)와 쉼표(rest)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소리(sound)와 침묵(silence)이 함께 어우러져야 진정한 음악이 된다는 뜻이다.
깨알 같이 복잡하게 그려진 음표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쉼표들… 그 쉼표를 살려가며 여유를 가지고 연주할 수 있을 때 진정 좋은 음악이 나온다. 때문에 나 역시 여유롭게 연주하기 위해 늘 고민하곤 한다. 음악은 연주자와 청중과의 교감이기 때문에 나 자신이 즐기고 여유를 찾지 못하면 음악을 듣는 이들 역시 여유롭게 감상할 수 없다.
베토벤 해석가로 유명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쉬나벨은 음악 속에서 음 자체보다는 쉼과 여유를 예술의 집이라 표현했다.
여유가 그렇게 중요하지만 정작 우리의 삶은 그리 여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한국 사람들의 조급증은 세계에서도 알아주지 않던가? 해외여행 중 한국 사람만 보면 ‘빨리 빨리’라는 말을 먼저 꺼내는 현지인들을 보며 한국말에 반갑기보다는 창피했던 기억도 있었다.
가끔 주변을 살펴보면 여유롭게 사는 이들을 볼 수 있다. 늘 미소를 머금고 모든 일처리 속에서 서두르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들. 사무실 복도에서 만나면 먼저 “How are you?” “일은 잘 되시죠?” “God bless you”같은 인사말을 건네며 웃음을 짓는 사람들이다.
여유에 대해 이야기하면 먼저 경제적 풍요함과 넉넉한 시간을 전제조건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부와 명예를 다 가진다 해도 누구에게나 진정한 여유가 따르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위대해지지 않고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자유롭지 못하면서 위대해질 수는 결코 없다.” - 칼릴 지브란의 시이다.
감사하게도 나이가 들수록 그의 시는 현실 속에서 가슴 깊이 느껴지곤 한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욕심은 우리 삶의 여유를 빼앗는다.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충족감을 느끼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 결국 돈의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그들은 각박한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는 종종 미국 땅에 처음 발을 내딛었던 그날을 떠올리곤 한다. 18년 전, 이민으로 유학으로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 LA에 도착하던 그 날. 흥분보다 떨림이, 기대보다 걱정이 앞섰던 나의 눈에 들어왔던 것은 다름 아닌 LA의 경치였다.
야자수가 늘어선 LA의 이국적인 풍경들, 내 마음을 탁 트이게 했던 반듯반듯한 길과 고속도로. 한껏 움츠렸던 내게 잠시나마 마음의 여유를 주었었다.
그러나 막상 한인타운에 와서 바쁘게 살고부터는 야자수가 있었는지 잊고 지낼 때가 많다. 가끔 110번 고속도로에 한 줄로 늘어서 있는 야자수들을 바라보며 그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우리가 얼마나 마음의 여유 없이 살고 있는지.
이민생활엔 서러움과 상처가 많다. 그럴수록 한 박자 쉬어가며 삶의 여유를 찾아가는 게 어떨까? 자전거에 페달과 브레이크가 있듯 우리 삶에도 여유를 부리며 웃을 수 있는 마음의 브레이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앤드류 박
베데스다대학 피아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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