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27일자 한국일보 오피니언에 실린 ‘등단하는 사람들’이란 칼럼을 보고 이 글을 쓴다. 언론사에서 바라보는 문인에 대한 견해라고 확대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 글의 시각은 잘못된 것 같다. 문인들과의 열린 토론이 필요하다면 대화하는 자리를 마련할 용의도 있다.
첫째, 해마다 등단하는 미주 문인의 수는 20여명 안쪽이라고 알고 있다. 마치 너나 할 것 없이 등단하는 것으로 알고들 있지만 그렇지 않다. 문단 등단이 다른 예술 분야보다 쉽다고 했는데 한국일보에서 문예공모전을 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모를 하는지, 그리고 당선자보다 몇 배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낙선하고 다시 많은 시간 의욕을 불태우며 차후를 도모하는지 담당 기자가 더 잘 알 것이다. 미주의 문인들도 작품을 위해 밤잠을 설친다. 문학적 성취와 세상의 인정을 받기 위해 인고의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둘째, 문인들은 등단을 통해 단체 활동을 하게 된다. 사회 규범이 그렇듯이 문학도 혼자 하는 행위가 아니다. 글을 쓰는 문인이 있으면 그 글을 싣는 지면이 있어야 하고, 읽는 독자가 있어야 한다. 물론 ‘향수’의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처럼 혼자 문학 활동을 하는 작가도 있지만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시대의 흐름과 대중적 공감 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내 견해이다. 따라서 단체 활동은 보다 나은 문학을 위한 공유의 행위다.
문인이 되기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돈을 받고 한국 잡지사에 줄을 대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이 있으면 사회 정화를 위해 밝혀야 한다. 만일 그렇지 하지 않는다면 기자는 본의가 아닐지라도 문단을 음해하는 것이 된다. 또한 언론사는 공짜 글이나 작품을 가져다 지면에 실어 이익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먼저 살펴야 할 것이다.
셋째, ‘문학이 허울 좋은 장식인가’ 하는 문제다. 더러는 등단하고 베스트셀러의 대열에 들어간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도 많다. 그러나 삼류 문예지에 등단했지만 후일 좋은 작가로 오래도록 일반 대중으로부터 사랑받는 작품을 쓴 이도 있다. 담당 기자는 과거 이야기를 하는데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지 묻고 싶다. 조선시대의 양반들이 누리던 문학을 말하는지 일제 강점기 시대의 암울했던 이야기를 하는지 아니면 고도의 고도성장을 추구하던 독재정권 하의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문인들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부정을 보면 몸을 던져 의를 보여준 예는 너무나 많다. 오늘날 현실은 문인이 대중을 선도할 시대는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아직도 음지에서 있거나 가난과 굶주림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줄 수 있는 이들이 적어도 문인들이 아니겠는가. 완성도를 높이지 못하는 문인에게 변명을 주자는 것이 아니라 함께 노력하자는 이야기이다.
문인들의 문인다워야 하고 해야 할 몫이 분명하게 있는 것을 안다. 마지막으로 문인들이 지금보다 좋아지고 나아져 갈 수 있도록 용기와 격려를 주고 따뜻한 위로를 준다면 문학의 힘이 극대화 될 것으로 본다.
<한길수> 시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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