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아름다운 명상-윤대녕의 <천지간>
1. 언제나 우리 안에 사는 죽음
죽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 도발적인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자 그리 많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안다. 오직 죽어 본 자만이 죽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터. 그럼에도 인간이란 언제나 죽음의 검은 그림자를 훔쳐보면서 그 출렁이는 어둠에 멀미를 앓는다. 죽음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으며 다만, 우리는 그것을 가끔씩 잊고 살아갈 따름인 것을 알기에, 우리는 가끔씩 우리 속의 죽음과 조우하며, 만지작거리며, 죽음을 비껴가고 있음에 안도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가.
우리에게서 아주 빠른 속도로 젊음이 빠져나가 듯 죽음은 같은 속도로 우리를 잠식하고, 삶의 이곳 저곳에서 죽음의 득의양양한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는 생각한다. 그렇지, 벌써 내 나이가 쉰인걸…,이라고 말이다. 그렇다. 죽음이란 나락과도 같은 심연에 닿아있는 존재의 근원적 사건이다. 죽음은 생의 본질이자 존재의 회귀이다. 윤대녕의 <천지간>은 이러한 죽음의 수사학 즉, 죽음이 스며든 우리 생의 한없는 가벼움과 죽음의 깊이에 대해 생각케 한다.
윤대녕의 <천지간>은 제 20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이다. 작가 한승원의 말대로 <천지간>은 한 편의 흑백영화 같은 소설이다. 소설을 시종일관 지배하는 황량한 느낌은 짐 자무쉬 감독의 <천국보다 낯선>이라는 영화에서 이미 경험해 버린 그 대책없는 고독과 생의 막막함을 닮아 있으며, 버림받은 젤소미나가 작은 나팔을 불며 방랑하던 오래된 흑백 영화의 슬픈 풍경과 겹쳐진다. <천지간>은 죽음에 관한 길고 긴 장편시를 읽을 때처럼, 혹은 색이 증발해 버린 아주 오래된 영화를 관람할 때처럼 존재에 대한 슬픔에 후루룩, 몸을 떨게하는 소설이다.
2. 죽음의 뒤를 밟다
외숙모의 부음을 받고 광주로 내려가던 중, ‘나’는 버스 터미날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된 여자의 뒤를 쫓아 완도의 구계등이라는 외진 곳까지 이르게 된다. 까마귀처럼 검은 상복으로 온 몸을 휘감은 내가 병아리처럼 노란 바바리 코트를 걸친 여자의 뒤를 쫓게 된 이유란, 시쳇말로 여자가 산 송장처럼 죽음의 냄새를 풀풀 날리고 있었기 때문.
‘나’라는 인간이 죽음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 한 없이 약해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 아주 오래 전에 가사죽음을 경험했을 뿐 아니라, 친구에게 죽음을 빚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의 인생은 죽음이라는 놈에게 고삐를 단단히 잡힌 채, 삶과 죽음의 어눌한 경계선에 서서 살아가는 가짜 삶, 혹은 꿈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섬을 배회하다 득음의 경지를 찾아 모여든 몇 명의 소리꾼들 중 유난히 어린 여자 소리꾼을 발견하고, 그 소리꾼을 통해 ‘나’의 외숙부와 외숙모와 ‘나’ 대신 익사한 친구와 노란 바바리의 여자를 동시에 본다.
그리고, 어린 소리꾼이 바다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던 그날, ‘나’와 여자는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된다. 여자는 자신이 임신 4개월 째이며, 목숨을 끊기 위해 그 섬을 찾게 되었던 것이라는 말을 남긴 채 다음날 새벽 사라진다.
‘나’는 생각한다. 진정, 살아있는 여자와 하룻밤을 보낸 것인가, 아니면 여자의 허물을 쓴 죽음과 하룻밤을 보낸 것인가. 도처에 널린 죽음 속에서 나눈 섹스는 어쩌면, 내가 오랜 세월 빚져 온 죽음에 대한 살풀이였으며, 자살한 소리꾼은 ‘나’의 살풀이를 위해 준비된 제물이었을 지도 모른다.
3. 모든 여행에는 오직 길만이 존재한다
<천지간> 속, 나와 여자의 아픔들 즉, 죽음이라는 전대미문의 수수께끼는 이 기묘한 동반여행을 통해 해소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통’됨으로써 더욱 아름답다. “영원한 물음, 당신은 어디에서 왔는가에서 도망하고 싶었다” 는 전혜린의 말처럼, “영원한 물음, 죽음은 무엇인가”에서 꽁지가 빠지도록 도망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
그러나, 생각해보라. 모든 여행에서 목적지란 허황된 것이며 마지막에는 오직 길만이 존재할 뿐이듯, 우리의 생 또한 죽음이라는 목적지보다 삶이라는 길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러한 생의 진실을 알아차리는 개안(開眼)은 우리 인생의 지난한 여행길에서 만난 타인과의 소통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묻노라, 저 꾀꼬리, 뉘를 이별하였는디 환우성 지지 울고 뜻밖의
두견이는 귀촉도 귀촉도 불여귀라 가지 위에 앉아 울건마는,
값을 받고 팔린 몸이 어느 때나 돌아오리.
둥덩 둥덩 떠나간다. 삼상의 기러기는 한수로 돌아든다. 진사를
지나갈 제 가태부는 간 곳 없고 굴 삼려의 어복 충혼 무양도 하시던가.
-<심청가> 중에서-
범피중류(汎彼中流), 혹은 범피백주(汎彼柏舟). 판소리 <심청가> 중 심청이 청나라 상인에게 인당수로 팔려가는 뱃길을 노래한 부분을 말한다. 심청이 죽음의 기로에 서서 천지만물의 아름다움을 새삼 발견하고, 생(生)과 사(死)에 대한 진실을 터득해 가는 부분이다.
<천지간>은 바로 어린 소리꾼의 죽음과 여인의 삶을 통해 범피중류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생과 사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바다와 땅의 경계가 어슬어지는 순간, 우리 몸 속에서 생의 빛을 감지한 감각세포가 갑자기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또한 그것은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음을 알아낸 우리의 정신이 휘황해지는 범피중류의 찰라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삶 속에서 수많은 범피중류의 순간을 대면한다. 그러한 대면의 순간이 어찌 위대한 역사적 순간이기만 하리. 툭하고 소리내며 떨어지는 한 알의 사과 속에 한 우주의 소멸이 깃들어 있음을, 불을 찾아 날아드는 나방의 안타까운 날개짓 속에 태풍의 눈이 숨어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러하기에 삶이, 지난한 인생의 여로가 아름답다는 사실도 말이다.
<정영화 기자> drclara@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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