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이민 102명이 SS 캘릭호를 타고 호놀룰루 항 제 2부두에 발을 디딘지 104주년이 됐다. 처음에는 돈을 벌어 금희환향 하려했던 첫 이민자들은 일제의 의한 국권말살로 통한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돌아갈래야 돌아갈 조국이 없는 이들은 일제에 대항하는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 , 당시 200만 달러라는 거대한 자금을 모아 조국의 독립운동에 보탰다. 이들은 87도를 웃도는 뙤약볕아래 하루 13시간의 고된 노동 끝에 받은 하루일당 1달러를 쪼개 독립자금에 보탰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오늘에 이르러 이민의 후예들은 5세를 이어오며 든든히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첫 이민선이 도착한 후 50년간이 일제에 대항한 항쟁기였다면 해방후 또 다른 50년간은 공산당과 싸워야 했던 시기였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 교수는 역사는 50년을 주기로 변한다고 했다. 오는 21세기의 50년간 우리는 어떠한 비전을 가져야 하는가? 안재호 박사는 일제의 강점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격동기를 보내왔다. 이러한 격동의 세월을 함께 해왔던 안박사는 “남자는 대범해야 한다” 3선- 하루 세번 돌아보라 이 말을 좌우명으로 새기며 살아왔다. 안박사는 청년기에 불치의 병이라 일 컫었던 폐결핵을 이기고 오늘까지 장수한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이며 미국의사면허를 따내기 위해 열정의 젊은 시절을 보내면서 미국인보다 2-3배의 노력없이는 이들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교훈을 주고있다. 그의 오늘이 있기까지의 삶을 통해 이민자가 이 사회에서 성공하는 교훈을 얻고자 한다. <필자 주>
대한민국 건국 후 2번째로 미국비자를 얻어 입국한 안재호 박사가 지난 4월13일(음력 2월26일) 9순을 넘겼다.
그가 76세때인 1994년 펴낸 “인정을 받고 인정을 준 의사의 생애”라는 자서전 머리말에는 “지난날을 돌이켜 보며 이글을 쓰는 것은 내 개인의 삶과 성취가 이웃과 친지들의 인정과 사랑에서 온 것임을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라고 그의 외길 인생을 정리했지만 그로부터 14년을 더 살아오고 있다.
안재호 박사의 생애는 한마디로 “보은의 인생”이라 할만큼 자신을 오늘에 이르게 한 분들에게 보답하는 인생관으로 살아왔다. “학교에 가서 배워야 한다”는 이발소 아저씨의 말에 자극을 받아 대구사범학교에 합격했으나 입학금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차 감천면 면장 장병규 어른이 학비에 보태라고 감천면 유지들로부터 모은 143원의 큰 돈을 준일에 대해 후일 의사로서 50년간이나 고향에 장학금을 전달하면서 후학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보은의 생활로 이어졌다. 해방되기전 세브란스 의전에서 공부를 마치고 1947년 내과의가 되기로 정하고 전문의 과정을 밟기 위해 마산의 국립결핵병원 근무를 자원했다.
마산국립요양원은 결핵치료뿐만 아니라 결핵의 대한 예방치료 뿐 만아니라 결핵에 대한 예방 퇴치를 연구소의 역할을 겸한 곳이었다.
그 당시 결핵은 동남아 전역에 확산되어 있고 한국에만 100만의 환자가 있던 때이다.
당시 결핵은 한번 걸리면 죽는 것으로 알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다음해 미국의 생화학자 왁스맨이 결핵의 특효약 스트레프트 마이신을 개발하여 노벨상을 받았다.
마산에서 결혼을 한 안재호 의사는 6.25전쟁을 맞아 부산으로 피난했다.
부산에서 보건사회부 결핵과장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휴전후 미국 맨하탄 제너럴 호스피탈에서 의사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게되었고 그후 미국유학을 결정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미국에 입국 인턴쉽 초청장을 보내 주었던 제네랄 호스피탈에서 인터뷰를 거절했다. 참으로 난감했다. 실의에 빠진 그에게 있어 뉴욕의 추위는 살을 에이도록 추웠다.
다행히 한미재단의 하워드 러스크 박사가 뉴욕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 내 도움을 얻어 든든히 씨 뷰병원에서 미국의사로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내 나이 36세였다.
씨 뷰병원에서 일하는 도중 결핵이 악화되 한쪽폐를 절단해야만 했다.
러스크 박사의 도움을 받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정부 수립후 2번째로 이민 허가를 받아 이민 2호가 됐다.
이때 안 박사는 미국이민을 통해 “인생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주고 받는 인정속에서 꽃피는 것이며 살아갈 수록 사람과 사람의 관계처럼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 후 5년여의 기다림 끝에 가족과 오클라호마에서 상봉한 그는 아칸소 분빌(Booneville) 주립병원에 자리를 잡았다. 이 병원은 45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결핵병원으로는 최고로 알려져 있는 병원이다. 외국의사는 안재호 한사람 뿐 이었다. 결핵환자 2,150명에 대한 치료, 임상 등을 관장하는 이 병원에서 자신이 앓았던 결핵에 대해 온 정력을 기울였다. 신이 준 기회였다. 연봉은 주지사 보다 많았고 먼저 있던 병원에 거의 두배나 됐다. 그러나 한국의 계신 형이 폐암에 걸려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부양해야 할 가족이 늘은데다 자신은 폐를 절단한 관계로 생명보험조차 들어주지 않았다. 폐를 잘라내면 10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생각이 장래에 대한 불안을 가중시켰다. 가족을 미국에 데려다 놓고 자신의 신변에 무슨일이 생긴다면 가족들은 고아가 될 수밖에 없기때문이다. 미국에서 의사라면 50만-100만불 정도의 보험은 다 갖고 있었지만 자신은 그럴 수가 없었다. 가족들의 생계대책이 봉급을 많이 받는 의사라지만 인색할 수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미국에 사는 아이들처럼 자립심을 키워주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의학계가 변해 외국인 의사시험과 주법에 따라 주 면허시험을 치뤄야 했다. 의사로서 자격이 없어지자 병원에서 청소부 일을 하면서 죽어라 공부에 매달렸다. 그러나 아칸소주는 외국인이 의사 시험을 치는 자격을 주지 않았다. 결국 버지니아에서 자격시험을 쳐 합격했다. 1년 6개월여 만이었다. 나이 40이 되어서야 텍사스 주 타일러 결핵병원에 초청을 받아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때가 1966년 이었다.
이때부터 자신이 오늘에 있기까지 도와준 분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보은의 인생을 시작됐다. 의사인 내가 고향사람들에게 빚을 갚는 길은 의술을 베푸는 것이었다. 의료혜택을 제대로 못 받고 있는 고향사람들의 건강을 보살피는 일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1968년 4월 한국으로 의료여행을 계획하고 가족들의 동의를 얻었다. 가족이 모두 이 일에 매달렸다. 많은 의약품과 의료기구가 모아져 돈으로 환산해 보니 1만 5,000달러 정도나 됐다.
이렇게 해서 고향을 방문, 피곤한 줄도 모르고 하루 150여명을 진료했다. 그는 의사로써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해서는 장가갈 때 입던 양복과 떨어져 가는 구두가 전부였다. 어떻게 보면 멋 없는 사내이지만 그의 근검절약은 격동기를 살아왔던 그에게 있어 몸에 배인 근검이었고 불확실한 미래를 위한 준비였다. 한 예로 그의 딸과 아들이 시집과 장가를 보낼 때도 고작 100달러를 결혼 비용으로 내줘 근 며느리한테 오해를 받기까지 했다.
그의 의사로서의 생애는 끊임없는 연구와 도전이었다. 지난 1973년 안박사는 전염이 안되는 비정형 결핵에 대한 연구논문을 발표, 학계의 관심을 모았다. 공교롭게도 비정형결핵환자는 타일러 근방에만 600여명이나 있어 임상연구에 큰 도움을 주었음은 물론이다. 또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무의촌 마을 감천에 지방 애국지사 이름을 따 죽포 장학회를 만들어 장학금을 주었다. 또 교회와 모교인 감천 국민학교에 피아노를 기증한 것을 비롯 필요한 교육시설에 피아노 6대를 기증했다. 이렇게 40년을 이어왔다.
안 박사는 그의 자랑스러운 생애가 이제 황혼기를 맞고있다.
<정광원 한국일보 텍사스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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