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활 퍼레이드 동행 취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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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시울이 붉어진 그는
연신 허공을 바라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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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광장에서 우리와 조우한 그들 가운데
수백 수천명이라도 우리와 선연을 맺게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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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경찰 모터사이클 2대가 비로소 엔진소리를 멈췄다. 뒤따르던 기마경찰대 말발굽 소리도 그쳤다. 제15회 한국의 날 퍼레이드 및 민속축제. 영어로 그렇게 쓰여진 플래카드가 제 무게에 겨운 듯 바람에 겨운 듯 휘영청 늘어졌다 팽팽해졌다 하며 시야에 들어왔다. 박수가 쏟아졌다. 환호가 쏟아졌다.
18일(토) 오후 1시쯤 SF 유니온 스퀘어 모퉁이길. 빠르면 좀 더디게, 더디면 좀 빠르게, 플래카드 바로앞 페이스메이커 박병호 전 SF한인회장의 표정이 몽롱했다. 울고 있었다. 이석찬 한인회장 패밀리가 탄 1호 무개차가 더욱 걸음을 늦췄다. 박수와 환호가 더 커졌다. 미소를 머금은 이 회장은 태극기를 흔들어 답례했다. 그러나 환영인파와의 눈맞춤은 길지 않았다. 눈시울이 붉어진 그는 빌딩숲 사이 허공으로 빈 하늘로 연신 눈길을 돌렸다. 둑도 아니고 언덕도 아닌, 찻길과 광장을 갈래짓는 그 야트막한 곳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변함없는 박수와 환호로 2호 무개차에 탄 구본우 총영사 부부를 맞이했다. 부부는 쉼없이 태극기를 흔들며 목례를 하고 또 했다.
시간대별 진행표인 듯 뭔가 손에 쥐고 행렬 앞뒤를 왔다갔다 하며 1시간20분, 그 길고도 짧은 여정을 완주한 서순희 공연단장(한인회 부이사장)은 골인지점에서 들이댄 기자의 카메라에 차마 눈을 맞추지 못했다. 글썽이는 눈물을 감추려는 것이었으리라. 환호와 눈물 그리고 미소, 박수갈채와 태극답례가 빚어낸 그 유쾌한 소란과 굉음.
끝의 보람, 뒤끝의 뿌듯함은 그토록 태산이었다. 그러나 처음의 걱정, 시작전의 조마함도 태산이었다.
5년만의 부활결정 그 자체가 시험이었다. 내둥 하다가 그만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텐데, 보여줄 게 없는데, 그러면 안하니만 못하는데, 보여줄 건 한국에서 데려오면 된다 해도 그 돈을 마련할 길이 막막한데, 돈이 있어도 준비할 시간이 빠듯한데, 바로 앞선 체전(6월29일-7월1일) 때문에 돈도 시간도.
그래도 한다. 이석찬 회장은 공식 임기시작(1월1일)보다 먼저 퍼레이드 부활의 깃발을 치켜들었다. 콘텐츠는 전문가에 맡기고 부족한 시간은 시간을 쪼개서 충당했다. 한국으로 어디로 부리나케 발품을 팔았다. 한인회 사람들 모두 발바리가 됐다. 슬근슬근 민심도 움직였다. 한푼두푼 모이는가 싶더니 금세 5만달러 10만달러를 웃돌고 목표치를 휙 지나 20만달러까지 넘었다(약정액 포함).
끝내는 인력이 문제였다. 볼 사람(관중)은 둘째치고 할 사람(자원봉사자)이 턱없이 모자랐다. 도보행렬대는 둘째치고 꽃차에 태울 사람마저 부족했다, 처음에는. 사정사정해 기껏 동그라미를 쳐놓았다 얼마 안가 일이 생겨 못온다는 전갈에 맥풀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는 경우는 양반이었다. 온다 온다 해놓고 안나타나 발을 구른 적도 많았다. 오죽했으면 최원 준비위원장은 축제 전전날(16일) 밤 두시간동안 축구를 하고 파김치가 된 후배선수들을 반강제로 징집(?)해 상항중앙장로교회(퍼레이드 부분연습장)로.
18일 오전 11시45분. 주황색 자원봉사 티셔츠를 입고 마이크를 잡은 본보 강승태 지사장의 구령에 따라 퍼레이드 행렬이 SF시청 앞에서 유니온 스퀘어를 향하여 첫 걸음을 내딛는 그 순간에도 빈 자리는 다 메워지지 않았다. 서울발 의상들이 적이 남았다. 그렇다고 빈 자리를 탓할 것까지는 없었다. 그게 불과 일이백이라면 채워진 자리는 무려 칠팔백이었니, 희망의 몫이 몇배였으니. 누가 그랬다, 떡을 준대도 그 정도 모으기 힘들다고.
그렇다. 그만큼 채워진 것만 해도 대단했다. 여섯살 어린이도 준비에서 종료까지, 시청에서 광장까지 네시간 이상 싱글벙글 견뎌냈다. 팔순 노인도 연등을 들고 사뿐사뿐 행군했다. 얼마전 눈수술을 했다는 아주머니도 선글래스를 쓰고 기꺼이 동참했다. 새크라멘토에서 달려온 한미부부도 바람에 부대끼는 깃대를 가까스로 부여잡고 웃음 가득한 얼굴로 대로를 함께 걸었다. 부모도 자녀도, 목사도 신부도 스님도, 사장도 종업원도.
배성준 변호사는 시청앞 기념식 사회를 맡은 뒤 곧바로 1호 무개차 운전사로 변신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얼굴이 벌겋게 익은 박준범 한인회 이사장은 어느새 신랑옷을 입고 꽃차를 탔다. 그 못지 않게 바빴던 최원 준비위원장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보이며 꽃차를 운전했다. 김수창 SF축구협회도 트럭을 몰고와 꽃차를 끌었다. EB한미상의 김용진 이사장과 김상만 한나라당 해외분과 가주위원장 등은 난생처음 장군복을 입고 육지의 배 위에서 장보고의 후예 흉내를 내느라 고역을 치르면서도 득의의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최봉준 SF노인회장과 윤석호 EB노인회장 등 어른들은 딸아들뻘 손자손녀뻘 코리안의 퍼레이드를 준비과정부터 오며가며 살펴보고 먼발치서 지켜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칠순을 앞둔 현역 축구인 유기형 SF축구협회 고문도 아침부터 시청앞에 나와 이상호 회장 등 후배축구인들의 봉사를 꼼꼼히 독려하고 든든히 후원했다. 커뮤니케이션 불찰로 무개차 탑승을 못하게 된 개빈 뉴섬 SF시장은 퍼레이드 시작 전 출발장에 들러 참가자들과 악수를 나누고 사진을 찍으며 성공행사를 비는 덕담을 건넸다.
꽃차에 나눠탄 SF소년소녀합창단 어린이들은 언제나처럼 한인사회 행사의 감초 귀염둥이들이었다. 길을 다 덮을 듯한, 그래서 바람에 치받쳐 더욱 요동치는 태극기를 함께 나눠 곱게 펼쳐든 글로벌어린이재단 어머니들의 한복은 한층 고왔다. 길거리 퍼레이드에서는 대타 기수로, 광장의 공연에서는 한인회 의뢰 설문조사 대행요원으로, 폐막뒤에는 행사장 뒷정리를 도맡고는 늦은 저녁 뒤풀이 식당에서 이석찬 회장에게 감사치레를 할 겨를도 주지 않고 자신들 밥값을 먼저 계산하고 떠난 SF정토회 회원들의 뒤태는 깔끔했다.
해보자는 의지 빼고는 모든 것이 열악한 상태에서 시작된 올해 퍼레이드가, 우르르쾅쾅 웅장한 북소리나 사물놀이 등 우리소리로, 덩실덩실 탈춤 등 우리춤사위로, 거리를 좀더 압도했더라면 보다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빼고는, 큰 성공이었다는 평을 듣게 한 결정적 요소는 또 있었다. 타 커뮤니티 이웃들의 참관, 그것이었다.
그로브길을 빠져나와 마켓 스트릿으로 접어드는 코너부터 눈에 띄게 불어난 멀고도 가까운 이웃들은 마켓 스트릿과 메이슨 스트릿이 만나는 지점부터 유니온 스퀘어에 이르는 동안에는 길 양쪽을 거의 가득 메웠다. 광장 손님들까지 포함해 어림잡아 1만명. 그들이 모두 우리의 잔치를 보러 일부러 찾아온 자발적 관객이었던 듯 말하는 건 정직하지 못하다. 대개는 우연히 그 시간에 그곳에 있어 우리와 조우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연이란 대개 우연히 맺어지고, 그런 우연이 어떤 필연으로 이어지는 법. 좋은 예감의 징조들은 숱했다. 대로에서 펼쳐지는 신기한 풍경을 담느라 혹은 카메라를 꺼내들고 혹은 휴대폰을 들이대고, 아니면 호기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더러는 무슨 일이냐 묻고는 코리안 데이 퍼레이드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더러는 박수를 치고 더러는 원더풀을 연발하고 더러는 엄지손가락을 보이고. 그저 무심히 바라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덩실덩실 어깨춤을 따라 추는 이들도 있었고, 언제 끝나나 하는 눈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다음에는 뭘까 하는 호기어린 눈을 번득이는 이들도 많았고. 그중 수백 수천명이라도 한국 한(국)인 한국문화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호감을 높이어 우리와 선연을 맺게 된다면.
묻혀진 퍼레이드를 5년만에 일깨워, SF 한복판 대로를 5년만에 다시 걸은 뿌리깊은 의미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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