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박사가 설립한 한인기독학원’(20)
▶ 학교의 정상 운영
1938년 졸업식 이후 얼마 안 되어 『태평양주보』6월 1일자에 「기독학원: 한인의 정체성」이라는 논설이 실렸다 (pp. 1-4).
요지는 ‘한인기독학원에서 영어·영문을 가르치는데, 영어·영문은 정부(공립)학교에서도 잘 교수함으로 어려운 재정에 한인의 학원을 설립할 필요가 없다.
한인기독학원을 특별히 설립한 것은 한국역사, 한국어, 한국문화를 교수키 위한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을학기부터 한문교사를 두기로 결정하였다.
더구나. 학생들이 오후에 정원 가꾸는 일로 시간을 보내는 대신, 오후에도 국문을 공부하도록 정원사를 두기로 하는 등 학생들의 한국관련 공부를 위한 특별한 조치를 취했음을 알 수 있다.
또 한인학원찬성회(후원회)에 주무원(직원)을 두어 찬성금(후원금) 모집에 주력토록 하였다.
후원금은 1천 달러를 목표로 하였는데, 이 기금은 한문교사, 정원사, 주무원(홍진표)의 1년 경비였다.
1938년 여름방학 동안에는 하기 국어학교를 개설하여 오전, 오후반으로 나누어 이만춘, 이규설(한인기독교회 김형식 목사의 조카로 그 즈음에 한국에서 온 것 같다)이 가르쳤다.
1938년 가을 학기에는 학생 40명이 있었고 그 중 36명이 기숙사에서 살았다. 학생 중에는 남녀 고아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학년은 1936년과 마찬가지로 9학년까지 있었고, 이규설이 한문교사였다.
기숙사 보모(사감)는 미주 본토에서 온 킬납 여사였다. 1939년 학기에는 38명의 학생이(남학생 21명과 여학생 17명) 있었고, 김 헨리, 김무궁, 채봉영은 집에서 통학하였다.
1939년 (23회) 졸업식이 6월 4일에 거행되었는데, 이승만의 부인 Francesca가 임시 교장으로 졸업식에 참석하였다.
6학년 졸업생은 이보경, 김무궁, 정대관, 신도현, 양 까스등 5명이고, 9학년 졸업생은 조수영, 정보조, 장정수, 김해조, 김호필, 김에드워드 등 6명이었다. 1939년 여름방학 기간에 학생 35명이 기숙사에 머물러 있었고, 백인 남자 선생이 남학생 기숙사감으로, 백인 여자 2명이 여학생 기숙사감으로 있었다.
이 방학기간에 임시 교장 Francesca가 이승만과 합류하기 위해 본토로 가 있는 동안 이만춘 국어선생이 학교사무를 맡았다.
한편, 1938년 말에 교장 이승만은 재무 Livingston, Dunstan, 양유찬, 강영복, 윈캔맨 여사의 연명으로 기숙사 주방설비 대체, 기숙사 집기 교체, 그리고 2명의 간호선생 월급을 위한 3천 9백 93 달러를 모금하기 위한 편지를 발송하였다.
그리고 이 기금 모집을 위하여 1939년 2월에는 한인기독교회에 모금특별위원으로 부인반에 김해(노듸)김, 공어진, 주끗순, 김봉순, 민함나, 남자반에는 이원순, 안시흡, 김이제, 김창수, 문인화, 김광재로 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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