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박사가 설립한 한인기독학원’(24)
▶ 1962년에 기금 전달
1960년 4월 19일 의거 후 하와이에 망명하여 있던 이승만은 1960년 8월 12일에 한인기독학원 이사진이 자신에게 부여한 권한으로 인하대학 학장과 최백렬, 주영한, 이승만 자신을 인하대학기금 관리위원으로 임명한다는 편지를 주영한에게 보냈다. 9월 13일자에 주영한이 한인기독학원은 해체되었고, 이승만이 관리위원이 되어서는 안 되며, 주영한 자신이 관리위원직을 맡을 것인지는 좀 더 고려해 보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이에 대해 최백렬이 답하기를, ‘한인기독학원 이사진은 없어졌지만, 기독학원을 해체하기로 결정한 회의에서 최백렬을 기금관리위원으로 임명하였기 때문에 관리위원으로의 효력은 아직 있다. 그래서 최백렬이 오중정 총영사에게 기금 관리를 맡겼다가, 주영한 영사에게 보냈던 것이다. 이제 그 기금을 다시 호놀룰루의 American Security Bank로 보내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1962년 5월 4일에 인하대학 이사회(이사장 정구영)에서 이 후원금을 인하대학과학관을 건설하는데 보탤 것을 결정하였고, 하와이 후원회에서는 Hawaii Hall 과학관 건설 경비로 쓸 것에 찬동하였다. 그러나 김장훈 학장은 1962년 10월 27일자 편지에서 Hawaii Hall의 건설비용을 전적으로 맡아주기로 했던 독지가가 못하겠다고 하여 건설계획이 취소되었음을 알려왔다.
1962년 11월 17일에 드디어 인하대학 기금이 기금관리위원으로부터 인하대학에 전달되었다. 최백렬이 기금을 서울로 가지고 갔을 때 하와이의 기금관리위원은 최백렬과 Wilbert Choi이었다. 1962년 11월 17일에 최백렬, Wilbert Choi, 그리고 인하공과대학 학장(김장훈) 등 3명의 이사 (trustee) 이름으로 이 기금을 한국상업은행에 입금하고 매달 미화 $2,534.97 [상당의]의 이자 (연 17%)를 받았다. 원금은 건드리지 못하고 이자만 학교 운영비 (operating costs of the college)로 사용하도록 결정되어 있었다. 11월 27일에 Wilbert Choi가 이사직을 사임하고 후임으로 로스앤젤스에 살고 있는 전 샌프란시스코 총영사 주영한이 임명되었다. 1962년 12월부터 1967년 10월 31일까지 후원기금의 이자수입이 25,237,114원이었는데, 이 기금 중 14,748,254원을 인하대학이, 8,458,500원은 한독실업학교가 그리고 나머지 2,030,360원을 학교법인 인하학원이 사용하였다. 1967년 6월에 병환 중에 있던 최백렬은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후임으로 김창원이 기금관리위원을 계승하도록 계승장 (Designation of Successor Trustee)을 남겼다. 최백렬이 8월 1일에 사망하였고, 9월 25일에 그 계승장을 당시 인하대학 학장 박철재가 날인함으로서 김창원이 기금관리위원이 되었다.
1968년 9월에 한진그릅이 인하대학을 인수받아, 조중훈이 학교법인 인하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런데 그 후 김창원은 조중훈으로부터 자신의 기금관리위원직에 관하여는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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