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함스 양(오른쪽)이 1950년 한국전쟁에서 실종된 남편 워너 중위와 신혼 생활을 즐기던 당시 모습. 워너 중위의 유해는 50여년이 흐른 뒤 발견됐다
미망인과의 애타는 사랑 편지와 사진 공개돼
1950년 11월 한국 전쟁에서 실종됐던 필라 교외 벅스 카운티 출신 미 육군 중위의 유해가 38선 이북 지역에서 50여년 만에 발견된 가운데 한국 전쟁 종전 직후 한국까지 건너가 실종 남편을 찾던 그의 부인과의 애타는 사랑 편지가 최근 공개돼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벅스 카운티에서 발행되는 지역 신문 ‘The Intelligencer’은 지난 17일 ‘오랫동안의 사랑 이야기‘(Love Story for the ages)라는 제목의 톱기사로 한국전 실종 육군 중위 워너 함스와 그의 부인 메리 함스(작년 84세의 일기로 별세)의 애타는 사연을 실었다.벅스 카운티에서 육군에 입대했던 워너 함스 중위는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뒤 베를린에 주둔할 때 행정반에서 근무하던 메리 피치몬스 양을 만나 사랑을 키웠다. 이들은 1949년 미국으로 돌아와 1949년 결혼했다. 꿈같던 신혼 생활은 1950년 6월 26일 북한이 한국을 침범해 워너 중위가 속했던 9보병 연대가 파병되면서 끝났다. 한국에서 사랑의 편지를 보내오던 워너 중위의 소식은 그해 11월 끊겼으며 이듬해 워너 중위의 친구 찰리 샤프가 실종 소식을 전해 주면서 악
몽으로 이어졌다. 샤프의 편지에 따르면 워너 중위는 1950년 11월 25일 북한 청천강 인근에서 중공군과 맞서 싸우다가 다리에 총상을 입고 걸을 수 없게 되자 스미스 중위에게 “나를 내버려두고 철수하라”고 말한 것을 마지막으로 실종됐다. 결국 미 육군은 종전 후 1954년 3월 워너 함스 중위(당시 29세)를 전사자로 처리하고 일 계급 특진시켰다.
그러나 2년간의 짧았던 결혼 끝에 홀몸이 된 메리 함스 양은 남편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1953년 적십자사에 입사해 한국 근무를 자원했다. 이 곳에서 부상 군인들을 돌보며 남편의 소식을 수소문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고 미국 남부 캘리포니아에 돌아와 두 번째 남편 우드 씨와 결혼했다. 워너 중위가 실종 된 지 9년 후였다.
메리 부인은 결혼 직후 워너 중위와 오갔던 편지, 사진 등을 가죽 지갑에 넣고 우드 씨와의 5자녀들이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메리 부인이 79세의 나이에 치매로 고생하던 지난 2001년 미 실종 군인 사무소는 워너 함스 대위의 유해를 38선 이북 지역에서 발굴했다고 연락했다. 메리 부인의 큰 딸 앤 우드 씨는 “친 아버지가 타계한 뒤 어머니의 첫 번째 남편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면서 “어머니는 두 번째 남편이 죽은 뒤 집 마당에 전쟁 포로와 실종 군인을 위한 깃발을 설치했다”고 말했다. 또 앤 씨는 “어머니를 첫 남편의 묘소에 데려갔지만 첫 사랑을 느꼈는지 모르겠다”면서 “지난 해 어머니가 사망한 뒤 첫 남편의 사진과 편지가 담긴 가죽 지갑을 열어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앤 씨는 12살짜리 아들이 “할머니는 하늘에서 2명의 남편을 만날 수 있겠다”고 말하자 “할머니가 2개의 팔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두 사람을 모두 안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홍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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