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바시장과 한인들 <2>
넘치는 일감… 80년대 불황을 몰랐다
1970년대 다운타운 한인 봉제업계는 거칠 것이 없었다. “허리 한번 숙이고 일어나면 그게 다 돈”이란 얘기가 나올 정도로 경기는 고공비행을 계속했다. 이같은 경기호황에 맞춰 한인들의 다운타운 진출은 속도를 더했고, 이는 80년대 본격적인 ‘자바시대’를 여는 한인들의 의류사업 진출이 활기를 띠며 다운타운 의류업계 장악으로 이어졌다.
70~80년대 거치며 봉제업계 장악
뛰어난 기술력과 공신력이 큰 무기
경영력 부재·상해보험‘난관’도 겪어
노동청 과잉단속‘봉제협회 탄생’계기
<80년대 한인 봉제업계는 불황을 모른채 발전을 거듭했다. 1984년 6월 일본 미싱제조업체의 초청으로 일본 현지공장을 방문한 봉제협회 회원들이 새 기종을 다뤄보고 있다. 가운데 기계에 직접 앉은 이가 9대 회장을 지낸 김영윤씨.>
1970년대 다운타운의 봉제업계는 주문은 넘치는데 이를 소화할 하청업체 부족 현상이 심했다. 또 봉제업계를 장악하고 있던 유대인 회사들은 노조들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같은 틈새를 이용한 한인들의 도전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하지만 뛰어난 기술력과 정확한 납기일 준수, 그리고 낮은 단가는 한인들의 중요한 무기였고, 이는 유대인 업주들에게도 그대로 먹혔다.
1976년부터 봉제공장을 운영했던 김히영씨는 “70년대 유대인 봉제업계를 뚫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유대인 업체에 가서 ‘일거리를 가지러 왔다’고 얘기하면 그 자리에서 일감을 내주며 기일을 알려줬다”며 “한인들의 입장에서는 유대인 봉제업체가 다른 업체들에게 주고 있던 하청가격의 절반만 받아도 크게 남는 장사였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다른 한인 봉제업계 관계자는 “한인들의 다운타운 진출이후 지금까지 30여년이 지났지만 당시 한인업소들이 받던 단가가 현재와 비교할 때 10% 차이도 나지 않는 것에서 당시 수입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1972년 800 블럭 브로웨이 길의 한 건물 5층에서 ‘스마트 프로덕트’란 봉제업소를 시작한 안이준씨는 “유대인 업주들은 일거리만 내주면 고마워하고, 다른 조건을 달지 않는 한인들에게 큰 호감을 갖고 있었다”면서 “깔끔한 일처리 등 자신들이 원하는 수준을 충족시켜 주는 한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전했다.
물론 한인 봉제업소들이 뿌리를 내리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과 시행착오도 적지 않았다.
특히 경영능력 부재에서 장비에 대한 경험부족은 순간 순간 맨손으로 시작한 한인들을 곤경에 빠뜨렸다.
수없이 밤을 새는 일은 봉제업을 시작한 한인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과정이었고, 어쩌다 미싱이 고장나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다른 미싱을 옆에 놓고 서로 하나씩 분해해 가며 문제점을 찾아 직접 수리하기도 했다. 정비 기술자가 오려면 2-3일을 기다려야 하고, 이러다 보면 기일을 맞추지 못해 결국 신용이 타격을 받기 때문이었다.
이와 함께 속칭 ‘철새들’도 한인업주들을 괴롭혔다. 한인여성 여러 명이 몰려다니며 한인업주들로부터 일감을 받아낸 뒤 납기일이 다가오면 돈을 더 달라고 요구하는 통에 애간장을 태우기도 했다.
또 봉제업계의 활황으로 소단위 공장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이로 인해 1980년을 전후해서는 업소수만 200여개를 훨씬 넘어서면서 전문인력 부족현상이 심화돼 스카웃 경쟁도 뜨거웠다. 심지어 같은 빌딩에 있던 경쟁업소 직원이 어느 날 다른 층의 업소에서 일하는 모습들이 심심치 않게 목격되곤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노동법 단속은 한인업주들을 힘들게 만들었다. 단지 열심히 일할 줄만 알았을 뿐 노동법과 세금보고 등 사업체 운영과 관련된 제반사항에 대해서는 사실상 백지상태였다.
봉제업소가 급증하면서 노동청 단속도 심화됐다. 한인업주들은 갑자기 공장 안으로 들어와 직원들로부터 근로조건을 청취하고 위반사항을 적발해 내려는 단속원들에게 속수무책이었다. 특히 영어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인격을 모독하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결국 한인업주들 사이에서는 단속원들의 활동이 도를 넘어섰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는 1978년 5월12일 ‘미주한인 봉제협회’가 탄생하는 계기가 된다.
또 1982년부터는 한인업주들에게 보다 합리적인 경영방법과 법률문제 등에 관한 정보와 지식을 제공하기 위해 김히영씨가 ‘경영교실’을 운영하기 시작, 10년간 진행되기도 했다.
한인 봉제업계는 80년대를 거쳐 90년대 들어서도 활기가 넘쳤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동안 잠재해 있던 불안요소들이 표면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90년대 상반기 봉제업계를 압박한 것은 상해보험이었다.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그동안 한인들이 주류였던 직원들이 타인종으로 대체되기 시작했고, 이들중 일부는 거짓으로 근무중 상해를 입었다며 보험금을 청구했다. 그리고 이같은 사례가 급증하면서 보험가입조차 쉽지 않았다. 또 잇단 가짜 상해보험 청구로 소단위 한인업소들이 줄지어 폐업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한인업주 등 다운타운 봉제업계 종사자들은 1993년 3월 다운타운에서 상해보험법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현재 한인 봉제업소수는 영세업소까지 포함해 약 1,500여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러나 수입은 예전같지 않다는 게 업주들의 전언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하청받은 단가는 30여년새 10% 내외 정도 오른 반면 인건비는 1974년 시간당 2달러에서 내년 1월부터는 8달러를 지급해야 해 결국 400%나 인상된 셈이 된다.
봉제협회는 그동안 27명의 회장과 이사장을 배출했다. 초대회장인 변창환씨는 당시 보험업에 종사했음에도 불구하고 회장직을 맡는 진귀한 기록을 갖고 있으며 봉협 창립멤버인 안종식씨와 5대 이사장인 김응식씨는 현재도 사업을 운영중이다. 또 박철웅 6대회장과 임의치 14대 이사장은 봉제업을 접고 목사가 됐고 2대 이사장이었던 이기명씨는 한인회장으로 당선되기도 했으며, 10대 회장인 오영환씨는 식당업, 17대 회장인 김성주씨는 카워시로 전업했다. 이밖에 15대 회장이었던 주중경씨, 19대 이사장인 박수명씨, 22대 회장인 최경종씨는 자바에서 의류업을 하고 있고, 김장섭씨(23·28대)와 배무한(25·26대)는 중임기록을 갖고 있다.
한편 8대 이사장인 구우율씨는 ‘구스’(Goos)라는 청바지 매뉴팩처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으며, 배무한씨 역시 대단위 봉제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다음주 월요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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