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와 ‘참여’ 이분법 넘어선 시 세계
‘첨단과 정지의 변증법’작품해설
김수영의 마지막 작품이자 대표작으로 간주되는 ‘풀’은 중요한 해석적 성과들을 많이 얻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는 듯하다. 이에 나름의 해석 하나를 제시해 보려 한다. ‘풀’은 표면 구조와 내면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둘이 균열과 모순을 안은 채 결합되어 있다. 이 두 구조 사이의 관계는 ‘풀’ 뿐만 아니라 김수영 시 전체의 비밀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관건이 된다.
먼저, 표면 구조를 살펴보자. ‘풀’과 ‘바람’은 대립 관계이다. 구체적인 근거는 일곱 번 반복되는 ‘보다’(비교격 조사)와 두 번 등장하는 ‘더’(강세 부사)이다. ‘바람’은 가해자이고 ‘풀’은 피해자이자 극복자인 듯이 보인다. 이 관계는 ‘눕는다/일어난다’ ‘운다/웃는다’를 대립(부정/긍정)적 의미로 해석하는 것과 연결된다.
‘바람’을 ‘외세’ 혹은 ‘독재자’로, ‘풀’을 ‘민중’으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지만, ‘풀’의 속성과 운명은 시의 공간에 내면화되어 존재의 정신적 영역까지 포괄하는 확장을 보여준다. 따라서 ‘풀’은 민중이나 시인을 포함한 존재 전체, 혹은 역사적 ‘주체’를 상징하고, ‘바람’은 이 ‘주체’에 가해지는 ‘바깥의 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다음, 내면 구조를 살펴보자. ‘풀’과 ‘바람’은 호응 관계이다. 숨은 구조가 은연중에 노출되는 지점은 1연의 ‘나부껴’(고통이 아닌 즐거움을 표현하는 동사)이다. ‘비’와 ‘동풍’은 ‘풀’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물’과 ‘운동성’을 부여한다. ‘풀’은 ‘물기’를 머금어야 잘 자라며(따라서 ‘운다’는 부정적 의미가 아니다), ‘바람’에 흔들려야 뿌리를 튼튼히 만든다(따라서 ‘눕는다’도 부정적 의미가 아니다). ‘바람’은 은총을 베푸는 자이고 ‘풀’은 수혜자가 된다.
이 관계는 ‘눕는다→일어난다’ ‘운다→웃는다’를 하나의 진행과정으로 해석하는 것과 연결된다. ‘풀’은 울어야 웃을 수 있으며, 누워야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풀’은 ‘주체’를, ‘바람’은 다른 세계에서 불어오는 ‘탈주체의 무의식적 잠재력’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김수영이 다른 시 ‘절망’에서 말했듯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풀에게,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듯이 바람의 구원이 밀려오는 것이다.
지금까지 ‘풀’은 표면 구조를 중심으로 해석되어 왔지만, 내면 구조를 함께 살펴야 이 시가 주는 ‘은밀한 공감’이 해명될 수 있다. 그런데 표면 구조와 내면 구조 사이에는 모순이 있다. 전자는 주로 참여시(민중시)의 관점과 관련되고, 후자는 순수시(실험시)의 관점과 관련된다. ‘참여/순수’의 이분법이 횡행하던 1960년대의 시단에서, 이 모순을 내포한 채 그것을 한 몸(시)에 변증법적으로 종합하려 한 것이 김수영의 시도였고, 이 시도가 농축되어 마지막 작품 ‘풀’에 녹아들었다.
그리하여 순수와 참여, 첨단과 정지, 해탈과 풍자 사이의 간극을 자신의 몸(시)으로 메우려 한 노력이야말로 김수영이 한국시에 남기고 간 중요한 자취이다.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혹은 시의 예술성과 사회성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려 한 김수영의 시적 추구는 모순과 균열을 안은 채 오늘의 우리에게 여전히 교훈을 준다.
오형엽(문학평론가ㆍ수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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