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에 철학적 사유 끌어들이다
■해설
김춘수는 한국시에 철학적인 사유를 끌어들임으로써 한국시의 영역을 넓힌 시인이다. 아름다운 서정시와 전위적인 실험시, 사회비판적인 참여시는 김춘수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시를 통해 하나의 사유를 보여주고자 하는 시도는 김춘수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그는 전쟁으로 인한 폐허 위에서 개인의 실존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출발해서,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려는 시도로 옮겨간다. 이 모든 질문은 ‘언어’의 문제로 귀결된다.
‘꽃을 위한 서시’는 언어와 존재에 대한 김춘수의 고민과 탐구 의지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시이다. 우선 이 시에 등장하는, 존재의 가지 끝에서 흔들리는 ‘너’는 ‘꽃’이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지는 꽃’은 ‘꽃’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라는 구절을 연상시킨다. 두 시에서 모두, 김춘수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꽃’이다.
그것은 하늘과 대지 사이에 있으면서 하늘이 내려주는 햇빛과 대지의 양분을 흡수하여 봉오리를 맺는다. 그런 의미에서 꽃은 신들의 눈짓을 일깨워주는 하이데거의 ‘포도나무’에 대응되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려는 시인의 의지는 벽에 부딪친다.
내가 ‘위험한 짐승’인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위험한 재보인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앞에 있는 대상을 하나의 언어를 사용해서 지칭하면서 오히려 그 대상의 본질을 망각한다. ‘이것은 책상, 이것은 연필’ 등으로 대상을 지칭하면서 우리가 알아낸 것은, 인간에게 어떻게 쓰여지는가를 기준으로 의미가 부여되는 도구적 존재자일 뿐이다.
때 묻은 언어의 사용으로 인해 대상의 본질은 오히려 은폐되고 마는 것이다. ‘나’의 손이 닿았을 때 ‘너’가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우는 울음’은 도구적인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인의 고민과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론적인 입장에서 볼 때, 언어는 도구성만으로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현 존재가 세계 내에 존재하는 방식의 하나인 ‘말’이 밖으로 표현된 것으로서의 언어는 사물적 존재자의 본질을 드러나게 한다.
이 때 언어는 하이데거식으로 이야기하면 ‘존재의 어둠을 밝혀주는 빛’과 같은 것이다. 시인의 울음이 돌에 스며 금이 될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다.
‘꽃’에서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존재에 드리워져 있는 도구성을 걷어내고 그 본질을 호명하는 것이다. 이 때 언어는 모든 인간적 말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말하여지는 신성한 언어 또는 신비로운 상징이며, 존재에 대한 계시와 같은 것이다.
물론 ‘꽃을 위한 서시’라고 해서 ‘꽃’보다 먼저 쓰여진 작품은 아니다. 시기상으로는 ‘꽃’이 먼저 쓰여졌다. ‘서시’(序詩)는 맨 먼저 쓰여졌거나 시집 맨 앞에 놓여 있어서 서시인 것이 아니라, 어떠한 시를 쓰겠다는 다짐이자 창작의 설계도이다. 따라서 ‘꽃을 위한 서시’는 ‘꽃’에 대한 김춘수의 시적인 관심이 집약된 의미 있는 시라고 하겠다.
문혜원(문학평론가ㆍ아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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