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단: 모압평야의 교회들
카이로를 떠난 비행기가 1시간 반이 지나니 암만공항에 도착했다. 불과 4시간이면 자동차로 남북을 가로지을 수 있다는 인구 6백만의 작은 나라 요르단, 그 말을 공항 청사를 나오면서 실감할 수 있었다.
공항의 규모로 보아 어느 작은 도시를 생각하면 될 듯했다. 그러나 입국수속을 하면서 우리는 이 작은 중동의 나라도 미국만큼이나 심각한 이민문제로 골치를 썩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일행중 서아프리카 가나에서 오신 목사님 한 분이 비자가 없어 입국이 거부되고 결국은 이집트로 송환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지 안내자로 캘리포니아 북가주 출신이며 현재 요르단에서 선교사로 일하는 백인 목사님 찰스에 의하면, 최근 중동지역 여러 나라에서 많은 이들이 요르단으로 살기위해 몰려오며 같은 아랍권 국가간에도 이것이 큰 문제가 된다고 했다.
요르단은 작은 나라이지만 서쪽으로는 이스라엘, 북쪽으로는 시리아, 동쪽으로는 이라크와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남쪽으로는 이집트 등과 접하고 있음으로 중동의 교차로라고 할 수 있고, 그런 이유로 최근 중동문제에서 아주 중요한 정치적인 역할을 해오고 있다.
특히 복잡한 중동의 평화문제를 다루는데 항상 중도적인 입장에서 서방세계와 다리 역할을 하기에 서양 사람들에게는 가장 편하게 가서 지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 전 세계에서 아랍어를 배우기 위해 가장 많이 찾는 곳도 요르단이며, 찰스에 의하면 특히 암만 소재 어느 아랍어 교육기관의 학생 3분의 1이 한국 사람들이라는 말에 나는 요르단이 한국인들에게도 인기가 있는 곳임을 알게 되었다.
요르단은 구약성경 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중요한 성지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세가 종살이하며 고난 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가기 위해 통과한 곳이 요르단이다.
민수기 20장 17절을 보면 애굽을 떠난 모세가 요르단 남쪽 에돔땅에 이르러 에돔왕에게 북쪽 가나안으로 가기위해 “왕의 대로”를 에돔의 왕에게 사용토록 허락을 요청한다. “포도원이나 밭을 다치지 않고 우물물도 마시지 않고 지나가게만 해달라”는 요청을 거부당하자 결국 모세 일행은 변경을 통해 힘든 여정을 계속하다가 모세의 형 아론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암만 공항을 떠난 우리 버스가 모세가 사용하지 못했던 왕의 대로(King’s Highway)를 따라 남쪽으로 달렸다. 고속도로로 포장된 것 이외에는 그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 한그루 없이 끝없이 펼쳐진 사막 한 가운데를 얼마나 지났을까?
해가 질 무렵쯤에 안내자가 오른쪽을 보라고 소리를 지른다. 저만치 구릉산 언덕에 요새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십자군 부대가 이슬람군에 저항하며 끝까지 싸우던 슈바크성(Ash-Shawbak)이라 했다.
7세기 중반 예루살렘을 비롯한 중동의 성지를 이슬람의 손에 다 잃은 중세 유럽의 교회는 11세기 말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주요 전략지에서 이슬람 세력을 격퇴한다. 많은 요새(Strongholds)를 건설하여 그 안에 교회를 회복시키고 기독교 문화를 세워가며 또 로마 제국의 무역통로인 왕의 대로를 사수해 내는 데 바로 슈바크 성이 그 중의 하나였다.
12세기 후반 이슬람 영웅 살라딘(Saladin) 장군의 반격으로 결국 예루살렘을 비롯한 모든 성지가 다시 이슬람권의 지배로 돌아갔지만, 그날 우리가 둘러본 슈바크성은 당시 십자군들이 이슬람군에 대항해 얼마나 치열한 전투를 했는지를 짐작케 해주었다.
그러나 믿음의 터전을 지키고 복음을 통해 그 척박한 사막의 땅을 변화시키려는 하나님 백성들의 선한 싸움은 그 이후 수 백년이 지난 지금도 그 모압평야에서 계속 되고 있었다.
비록 전체 인구의 95%가 모슬림이지만, 이슬람이전 이미 수 백년 전부터 그 땅의 자리를 지켜온 교회 공동체들이 아직도 이슬람의 억압적인 문화 속에서 당당하게 복음을 가르치고 지역을 섬기며 선교에 힘쓰고 있었다.
현재 요르단 복음주의 신학교 총장으로 일하는 쉐하데 목사님(Dr. Imad Shehadeh)은 원래 캘리포니아 UCLA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던 중에 학교식당에서 전도를 받았다고 한다.
공부를 마치고 요르단으로 귀국해 캠퍼스에서 전도를 하는 중에 많은 젊은 이들이 회심을 하고 복음의 열매를 맺자 당국에 알려져 미국으로 추방을 당하게 되는데, 하나님은 이 분으로 하여금 다시 신학공부를 하고 박사학위를 받아 나중에 다시 본국에 가서 신학교를 세우게 하셨다고 한다. 현재 이 학교출신의 많은 목회자들이 요르단에서 사역에 열중한다고 했다.
우리가 방문한 성조오지 희랍정교회는 서부요르단에 있는 수백년 역사를 가진 교회다. 법적으로 모슬림교도들을 전도할 수는 없지만, 이 교회는 학교를 통해서 기독교 정신을 커리큘럼에 넣어서 가르치는데 이 학교는 명문학교로 소문이 나서 모슬림 가정의 자녀들 수가 더 많다고 했다.
주일 아침 인근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예배 중에 만난 이라크 출신 한 여성이 호텔로 와서 자기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 주었다. 크리스챤 어머니와 모슬림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늘 종교적인 갈등을 가지고 살아온 34세의 이 여자분이 정치적인 망명자로 요르단에 거처를 잡은 후 신분증 상의 종교는 이슬람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분은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다. 요르단 정부의 종교경찰의 적발을 받으면 생명의 위협을 받는 일임에도 이 길이 옳은 길임을 알고 기쁘게 선택했다고 한다. 언젠가 이라크에 돌아가 가족들을 전도하는 게 유일한 꿈이라고 했다.
짧은 일정 가운데 만난 그 수 많은 믿음의 용사들을 생각하며 요르단의 핵심 느보산을 올랐다. 이 곳은 신명기 34장에 기록된대로, 모세가 출애굽 여정을 마치고 요단강을 건너기 직전 자신은 이제 때가 되어 그 곳에서 죽게 되지만, 하나님의 약속대로 강 건너 저편에 가서 살게 될 자기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을 가리키며 마지막으로 축복하며 설교한 곳이다.
계곡을 굽이 굽이 올라 얼마를 갔을까? 느보산이라는 간판과 함께 언덕 위에 세워진 늠름한 교회의 십가자가 눈에 들어왔다. 버스에서 내려 작은 언덕을 가로질러 걸으니 산 밑 저 편으로 넓은 모압평원이 넓게 눈에 들어왔다. 또 좌편 저 멀리에는 사해바다가 어렴풋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 곳에 서서 마지막 설교를 하던 하나님의 종 모세를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인간 모세. 그 분인들 왜 미련이 없었을까? 앞에 펼쳐진 강 건너 약속의 땅을 보며 또 앞에 둘러 서 있는 백성들 얼굴들 하나 하나를 바라보는 순간에, 지난 40여년 험난한 광야생활 가운데 있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그 눈에 떠 올랐을 것이다. 그 순간 아직도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않은”(신34:7) 것을 이유로 대며 “하나님 마지막으로 저 강만 건너게 해 주십시요…”라고 간청을 할 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때,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정하신 한계를 알았다. 이제는 깨끗이 물러서 바톤을 자기의 종 여호수아에게 넘겨주는 하나님의 종 모세. 행여 자기의 무덤이 저들이 앞서 나아가는 데에 장애가 되지 않을까를 염려하여 흔적도 남김없이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외치는 말씀: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신31:6)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