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내가 그린에서 막 짧은 퍼팅을 하려는 순간 한 여인이 숨을 몰아쉬며 그린 위로 뛰어들었다.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사내의 손목을 잡아끌며 소리쳤다.
자기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요? 바로 우리 결혼식 날이잖아요. 어쩌면 이럴 수가 있어요? 잠깐만! 사내는 퍼팅을 성공시킨 뒤 말했다.
만일 비가 오면 결혼식을 하기로 했잖아? 비가 오면 말이야. 그날은 매우 화창한 날이었다.
골프장 옆으로 영구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길 옆 홀에서 퍼팅을 준비하던 한 사내가 장례행렬이 지나갈 때까지 모자를 벗고 경건하게 묵념을 했다. 친구가 말했다.
자네가 그토록 정이 많은 사람인줄 몰랐네. 고인과는 잘 아는 사이인가? 묵념을 끝낸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묵념이라도 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군.
고인과는 매우 가까운 사이지. 이틀 후면 25회 결혼기념일을 맞이했을 텐데 먼저 가버렸다네.
며칠 후 두 사내는 또 골프를 쳤다. 도로 옆 홀에 이르렀을 때 또 장례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다. 선두의 차 위에는 꽃 대신 골프채가 얹혀 있었다. 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골프애호가가 죽은 모양이군. 골프채와 함께 묻어달라고 유언한 모양이지? 그러자 다른 사내가 말했다. 저 영구차에는 잭슨 마누라가 누워 있네. 하관식이 끝나는 대로 잭슨은 골프장으로 직행하려고 골프채를 싣고 가는 거야.
서양의 골프일화에는 이처럼 일생의 중요한 일이 벌어진 순간에도 골프를 포기하지 못하는 골프광들의 이야기가 꽤 많다.
골프붐이 일고 있는 이 땅에서도 비슷한 일화를 자주 듣게 된다. 친구 P는 주말출장을 몇 시간 앞두고 장인의 부음을 듣게 되었다.
장인은 노환으로 장기간 입원 중이었던 탓에 충격은 덜 했지만 P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골프광인 그는 주말골프의 유혹을 쉬 떨치기 힘들었지만 아무래도 골프장에 간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P는 별 기대 없이 아내에게 말했다. 내일 아침에 골프약속이 있는데 취소해야겠군. 그런데 아내의 입에서 귀가 번쩍 뜨이는 대답이 나왔다.
왜 취소해요? 갔다가 오면 되잖아요. 아내가 이처럼 위대해 보이는 순간은 없었다.
자신 못지 않게 골프를 좋아하는 아내이긴 하지만 부친상을 당하고도 남편의 골프를 허용하다니.
P는 골프가방을 챙겨 집을 나서면서 정말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
라운드 내내 아내에 대한 감동과 돌아가신 장인에 대한 애도의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지만 이런 경황에 골프채를 휘두르는 자신에 대해서도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다.
물론 그날의 스코어는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그는 빈소가 차려진 병원으로 향하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아직 멀었어. 이런 와중에서도 골프삼매에 빠질 수 있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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