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가 없었던 40년대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난 나는 화장실에 가려면 밖으로 나가야 했다. 밤이면 살살 배가 아파 단잠 주무시는 할머니를 깨워 함께 촛불 켜들고 향했는데 비가 올 때면 우산까지 펴들고 갈 때도 여러 번이었다. 귀찮기가 말할 수 없었지만 촛불은 그 때 유일한 해결사였다. 외아들이셨던 아버님께서는 일 년에도 여러 번 제사와 차례를 지내셨는데 목용재계하고 의관 갖추신 후 무릎 꿇고 앉으셔서 정성을 다해 축문을 쓰시고 제사상 양 옆에 촛불을 준비하셨다.
어머님께서는 그 촛불 밑에서 주로 바느질을 하셨는데 늦게까지 불이 켜 있으면 할머님께서는 약간 큰 음성으로 “어멈, 어서 자고 밝은 대낮에 해라” 하셨다. 양초를 오래 켜놓는 것은 낭비라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양초는 석유 등잔보다 밝고 편했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 생일 케이크 위에 가냘프고 조그만 촛불을 나이 숫자대로 켜 꽂아놓고 박수 치며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면 축하의 분위기가 한층 고조되는 것 같았다.
요즘에는 형형색색 향기로운 냄새까지 풍기는 예쁜 초들이 있어 집안 여기저기에 켜놓고 분위기를 띄울 때가 많아졌다. 그런데 가끔 한국 뉴스를 듣고 싶어 켠 TV에서 어마어마한 촛불 시위대를 보면서 어릴 때 한 개의 촛불에 흐뭇해하고 갖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주었던 40년대가 떠오르고 먼저 경제성장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시위대원들도 전경들도 모두 우리의 아들, 딸, 형제, 자매들이다. 절대로 물리적 충돌만은 없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하루속히 각자 본연의 임무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정치인들은 국민의 목소리를 심사숙고하여 듣고 나라를 위한, 또 국민을 위하는 참신한 결정이 무엇인지 모두가 기뻐할 수 있는 올바른 답을 내놓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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