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국 60년 역사속의 숨은 주역들
▶ 하와이 국민회, 동지회 후손들을 찾아...
4) 하버드 의대에서 와히아와까지 에드먼드 황 박사
에드먼드 황박사는 하버드 의대를 졸업후
귀향해 동생을 돌보며 의사로, 동지회 부회장,
그리고 신앙인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라나이 섬에서 태어나 지금은 와히아와에서 병원을 운영중인 가정의료 전문의 한인 2세 에드먼드 황(66)박사를 만나보았다.
선친 황원일씨와 예레미 여사 사이에서 3남 중 차남으로 출생한 황박사는 이올라니 스쿨을 졸업한 후 2년 먼저 하버드대에 입학한 형 레이먼드를 쫓아 같은 대학에 진학, 분자생물학을 전공했고 곧이어 뉴욕주립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황 박사는 졸업후 인턴을 마치고 해군에 입대해 베트남전에 참전했었고 이후 군 내 의료기관에서 근무하다 1975년에는 하와이로 돌아오기에 이른다.
1987년 개업이후 30여년간 운영해온 와히아와의 패밀리 메디컬 센터에는 자신과 같은 일본, 필리핀, 한국에서 온 초기 이민자들의 후손들이 주로 찾고 있다고 전했다.
황 박사는 소시적 영어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부모님으로 인해 집에서는 절대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특히 하와이 고유의 사투리인 ‘피진’의 사용을 엄금했었다고 회고한다.
때문에 그는 현재 한국어 실력이 어린아이 수준이라며 수줍어 한다.
황 박사의 모친 예레미 여사는 1990년에 작고했는데 생전에 와히아와 렐레후아 중학교, 카알라 초등학교 등에서 수학과 영어 등을 가르쳤고 2001년에 세상을 떠난 선친은 돌 파인애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었다고 한다.
황박사가 의사가 된 것은 선친의 권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친구와 어울리기 보다는 혼자서 공부하고 모든 일을 혼자 해결했다. 특별히 과학분야에 관심이 많아 선친은 생전에 “너는 남의 밑에서 일 할 성격이 아니니 의사가 되라“고 했다는 것.
하버드대 진학이유에 대해서도 황 박사는 “선친께서 정 본토로 가고 싶다면 최고의 대학에 갈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그저 ‘하와이대학’이나 가라”고 말해 형이 재학하고 있던 하버드대를 가기로 작정하고 그 목표를 이루었다“고 회고한다.
황 박사(사진)는 1975년 하와이로 돌아온 이후로 고교시절부터 신경쇠약증세를 앓고 있는 동생 델윈(58)을 돌보며 함께 생활하고 있다. 지난해 동생과 함께한 멋진 성탄 칸타타 공연은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라고 전했다.
아직도 미혼인 황 박사는 1990년부터 릴리하 스트릿에 위치한 한인기독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어느 날 문득 노봉린 목사가 강의한 ‘육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일 뿐 수명이 다하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만 남는 다’는 로마서 말씀에 충격을 받고 ‘과연 나의 영혼이 천국에 돌아갈 만큼 성장했는가?’라는 물음을 자신에게 던진 후부터 신앙인으로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황 박사는 “좋은 기독교인이자 의사가 되는 것이 자신의 좌우명”이라며 어떠한 직업을 갖든지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전했다.
현재 교회 합창단에서 알토부분을 맡아 활동하고 있는 황 박사는 동지회 부회장으로도 활동하며 올 12월 교회설립 90주년을 앞두고 기념사업 준비에도 참여하고 있다.
<김민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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