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의 땅
=====
이번 봄 한국 방문에서 원효의 발자취를 밟아보고 싶은 오랜 나의 숙원이 풀린 듯하다. 천성산은 대사께서 수행승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보내신 득도의 땅으로, 동래와 양산과 울주울산을 산 밑에 품고 있는, 높지는 않으나 골이 깊은 참으로 넉넉한 산이다.
골짝마다 물이 넘쳐 샛강이 거미줄 같이 퍼져 있고 농산물과 수산물과 해산물이 비교적 풍부한 곳으로, 신라의 경주를 유지해주는 뒷심이 되어준 땅이기도 하다. 천성산의 동해안 바다쪽인 장안읍에서 산허리에 있는 장안사를 지나 비탈길을 올라가면 바로 척판암을 만나게 된다.
척은 던진다는 소리고 판은 판떼기라는 뜻인데 원효 스님이 판떼기를 던져 날렸다는 암자다. 이 암자는 근대의 경허 선사께서 오래 머물면서 중창하셨다고 안내판에 쓰여 있는데 중창이란 단어에 쓴웃음이 난다. 손바닥만한 암자에 무슨 거창한 중창까지야.
원효 스님이 세운 절이라는 게 다 이 모양이다. 짐승이나 벗할 수밖에 없는 척박한 자리뿐이다. 첫째는 시주자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인적 드문 곳이라야 하고, 둘째는 식량의 공급이 부족해서 굶는 것이 일상생활이 되어야 하며, 셋째는 목수가 드나들며 못질하고 대패질하는 불사라는 것이 없는 곳이라야 사문이 있을 만한 자리라는 것이다.
요즘 한국 사찰들의 선방이라는 곳이 다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여 인체에 가장 쾌적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꾸며져 있는 것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고 할 것이다.그러나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든 사람이 마리화나를 피우든 수행에 편안함이란 독약과 같음을 어찌하랴.
대사는 글로써 그의 심정을 남기고 있다.
<세속에 연연함이 없음을 출가사문이라 한다. 수행자가 세속의 일에 회포를 품는다면 마치 개가죽을 둘러쓰고 사는 꼴이다. 재주와 풍채가 뛰어나도 세속에 사는 삶은 모든 불보살이 슬피 여기고 근심하시며, 설사 깨달음이 없으나 산중 암자에 사는 자는 여러 성인이 이들에게 환희심을 내느니라. 수도인이 탐심을 품는 것을 이름하여 수치라 하고 출가자의 소유는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느니라. 메아리 울리는 바위구멍에 앉아 법당을 삼고 산새들의 울음소리로 친하고 즐거운 벗으로 삼아라.
절하는 무릎이 얼음 같이 차가워도 따뜻함을 생각말고 주린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아도 밥 구하는 생각을 품지 말지어다. 좋아하고 사랑해서 구하는 것을 멀리 떠나보내는 것이 수행사문이더라. 나무 열매를 따먹고 주린 창자를 위로하세. 흐르는 저 골짝물은 갈증에 충분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푸른 나무와 깊은 골짜구니는 새와 짐승과 수행자가 머물 곳이니라.>
이런 글을 지으며 원효는 천성산을 벗어나지 않았다. 어느 날 원효는 급히 <해동사문 원효>라는 글을 판자에다 쓰고는 산꼭대기를 향해 냅다 던졌는데 이 널판지는 많은 사문들이 머물며 공부하는 중국의 어느 절 마당에 도착해서 계속 빙빙 돌더란다. 신기하고 놀란 스님들이 우르르 절 마당으로 나와 UFO 같은 널판지의 춤을 구경하고 있는데 산이 흔들리는 지진이 나서 법당이 폭삭 주저앉는 큰일이 났다는 것이다. 요즘 중국의 사천성에서 일어난 지진 같은 것 모양이다.
이 UFO 같은 널판지의 요술은 원효 스님이 이들을 구출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 소문이 중국 각지에 퍼져 천여명이나 되는 구도자들이 원효를 찾아 해동의 천성산으로 몰려들었다는 것이다. 원효는 천성산 골짝마다 암자를 짓게 하여 그 수가 팔십아홉이었다고 하는데 이들을 말하자면 분산수용한 것이다. 그리고 낮이면 천성산 꼭대기의 갈대평원에다 이들을 모아놓고 화엄경을 강설했다고 한다. 이들은 전부 한소식들을 하여 화엄신중이 되어 돌아갔다고 하는데 천명의 성인이 배출된 산이라 하여 천성산이라 부르게 됐고 판떼기를 던진 암자는 척판암이 된 것이다.
천성산에서 서쪽을 향해 내려다보면 멀리 경주에서 언양을 거쳐 부산으로 뻗힌 경부 고속도로가 보이고 뒤편으로는 가지산과 영축산을 중심으로 웅장한 영남 알프스가 버티고 있어 동해의 거친 바닷바람을 막아주고 있다.
이 영남 알프스는 자장 율사의 땅이다. 통도사를 건립하고 무수한 암자를 그 산 속에다 뿌렸다. 석남사를 넘어가면 운문사와 표충사 등을 품고 그 산자락의 여세는 밀양과 낙동강을 건너 김해 창원 마산 쪽으로 이어지는 <경상도 불심>의 핵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위대하기 때문에 격이 없을 수 없다. 그래서 대영웅을 모시는 대웅전은 장엄해야 하고 그의 식솔이 살고 공부하는 가람은 커야 한다는 게 자장 율사의 큰 신심이다.
지금에 와서도 산이름은 낮아지고 절이름은 높아진 것이 자장 율사의 땅이라면, 절이름은 작아지고 산이름만 우뚝한 것이 원효 대사의 땅이다. 유위를 꿈꾼 대성 자장 율사와 무위를 꿈꾼 사문 원효 대사의 차이점이라 할 것이다.
천성산 정상의 대평원은 갈대가 무성한 습지대인데 침묵을 불러일으킨 대사의 큰 외침은 어디로 갔는지 아득하기만 했지만 답답한 방안을 환기시키듯 내 정신을 신선하게 환기시켜준 것을 나는 은혜로 받아들인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