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켓에 한국분이 들어와 장을 본 경우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없다.
수년전, 저녁 늦게, 길을 잃은 주재원이 우연히 찾아와 길 가르쳐준 고마움에 맥주 한 케이스를 사간 것 이외는 없다. 그런 경우로 미루어 볼 때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앞으로 어느 때에도 우리 마켓으로 한국분이 장보러 오는 경우는 없다고 단언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내 생각이 틀렸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동양 남자와 여자가 마켓 안으로 들어왔다. 중국인이겠거니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아주 귀에 익숙한 인사말이 들렸다. “안녕하세요?” “아, 한국분이시군요? 이 마켓을 어떻게?” “저 아래에서 마켓 하는 친구가 알려주었습니다. 이곳 고기가 맛있다고 하더군요”
나는 한국 사람이, 부부가 고기를 사러 우리 마켓을 찾아 왔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하고 놀랍고 반가워서 두 사람을 정육부로 안내하고는 루빼에게 말했다.
“루빼, 최고로 싱싱한 것으로 잘 쓸어드려라”
부부가 고기를 산 뒤에 아내가 남편에게 말했다. “이왕 들어 온 김에 여기에서 장보고 가요”
아내와 남편은 카트를 끌고 마켓을 돌기 시작했다. 아내는 야채와 과일을 골랐고 남편은 빅 세일중인 맥주와 하드 리커를 잔뜩 카트에 실었다.
나는 한국 사람이 우리 마켓에 들어와서 카트가 넘쳐나도록 물건을 고르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감사한 마음에 흐뭇해하고 있었다. 장을 다 본 부부가 카트를 밀고 계산대 앞으로 왔다. “어이구! 웬 걸 이렇게 많이 담으셨어요?” “다른 데 가기가 귀찮아서요” “그렇지요. 저도 어디 들어가면 그곳에서 다 사버리고 말지요”
나는 카트를 하나 더 끌고 와 계산된 물건을 옮겨 실었다. 268달러 39센트.
여자가 내미는 수표를 받아 텔레체크에 넣었다. 코드 4.
“이상하다? 안되는데요? 다시 한 번 더 해볼까요?” “안될 리가 없어요. 새로 오픈한 거라서 돈이 있어요. 다시 해 보세요.”
두번 세번을 돌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열 번을 돌리고난 뒤에 수표를 돌려주면서 물었다. “혹시 크레딧 카드는 없으세요?”
여자가 아주 묘하고도 낭패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남편을 바라보았다. 남자가 지갑에서 비자카드를 꺼내 나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혹시 내가 잘못해서 카드 결제가 안 되면 어쩌나 싶어서, 정중하고 신중하게 카드를 그었다. 한 번.두 번.세 번.네 번.다섯 번.
“혹시 다른 카드 없으신지요?”
남자가 다시 지갑을 열고는 다른 카드를 꺼내 주었다. 그리고 또 다른 카드. 또 다른 카드. 내가 불안하게 그들을 바라보자 남자가 다시 지갑을 꺼내더니 지갑을 뒤지기 시작했다. 지갑 이 구석 저 구석에서 현금을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여자는 새로 오픈한 구좌의 수표를 아직도 손에 들고 서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남자가 손에 든 현금을 세고 또 세더니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아내와 무슨 말을 주고받았다. 여자가 얼굴이 하얘지면서 고개를 흔들더니 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혼자 남은 남자가 카트에서 술만 집어 들더니 그것만 사겠다고 했다. 22달러 50센트.
고기가 아니고 술만 사가? 그것 참!
밖에서 두 사람이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망설이다가 나는 슬그머니 문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남자는 술을 차에 싣고 있었고, 그의 조그만 아내가 울고 서 있었다.
나는 계산대 앞에 서 있는, 고기와 과일과 야채가 하나 가득 실려 있는 카트를 바라보며 화를 벌컥 냈다.
“야, 이거 빨리 제자리에 갖다놓으라고 했잖아.”
이윤홍
시인·자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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