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는 독서량이 방대하고 넓어서 그의 집에 갈 때마다 나는 댓바람에 책장 앞에 서서 그 사이에 또 무슨 새로운 책이 생겼나, 한권, 한권 들여다본다. 그러다 흥미가 느껴지는 책을 발견하면 막무가내로 갖고 온다. 말릴 수 없는 나의 고집을 젊은 그가 허허 웃으며 져주는 걸 보면 책만이 아니라 그의 따스한 맘까지 들고 오는 것 같다. 지난해도 역시 그의 책을 한 아름 들고 왔는데 책 사이에 누르스름한 한지 기분이 나는 케이스의, 그래서 왠지 오래된 영화일 듯 느껴지는 비디오가 있어 그것도 갖고 왔다.
‘봄날은 간다.’
청순한 분위기의 여자가 선해 보이는 눈매를 가진, 여릿여릿하게 생긴 젊은이의 가슴에 머리를 대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진.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누나...’하고 시작하던 그 옛날의 그 노래를 기억 못하는 젊은 세대에겐 이해되지 않는 일이겠지만‘봄날이 간다’는 그 간단한 한 마디는 헤이지 못하는 많은 세월의 냄새를 물씬 풍기며 가슴에 밀려왔다. 세월이 사랑을 어떻게 부식시키며 세월이 사랑을 얼마나 남루하게 만드는지, 세월이 우리의 모습을 어떻게 변화 시키며 세월이 우리의 감성을 얼마나 마비시키는지를 너무도 잘 알게 된 나이. 젊음이 활활 타오르는 시절의 눈엔 오히려 살아있다는 사실이 모욕으로도 느껴질 것으로 상상했던 그 자리에 지금 서서 그 때를, 봄날을, 되돌아본다.
사랑하는 사이엔 언제나 더 사랑하는 사람과 덜 사랑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 이 영화에도 외로움 때문에 잠깐 기댔던 이혼녀의 짧은 사랑이 있고 또 그 사랑을 내내 붙잡고 싶어 했던 순진한 젊은이의 아픈 사랑이 있다.
바람에 쏴아 흔들리는 대나무 숲의 설레는 소리, 녹아가는 눈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 고요한 산사의 풍경소리, 그리고 조촐한 시골의 풍광 뒤에 바람처럼 들려오는, 자우림의 가수, 김윤아가 부른 OST.
이상하게 째랑째랑하게 내지르는 목소리가, 이상하게 반음을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며, 그친 듯 했다 계속되고, 끊어진듯했다 이어지는 노래는 들을수록 마음이 묘하게 처연해진다. ‘눈을 감으면 문득 그리운 노래 기억/ 아직까지도 마음이 저려오는 건/ 그건 아마 사랑도 피고 지는 꽃처럼/... /봄날은 가네. 무심히도/ 꽃잎은 지네,바람에/ 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사랑들/ 봄은 또 오고. 꽃은 피고 또 지고...
봄에, 너무도 눈부시게 예뻐 동네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던 서양양귀비, 셜리파피가 그 예쁜 꽃잎들을 다 떨구고 누렇게 말라간다. 대궁을 뽑아 쓰레기차가 거두어가도록 차곡차곡 쌓아올리며 가슴에 메아리치는 노래에 귀 기울인다.
꽃잎은 지네 바람에...봄은 또 오고. 꽃은 피고 또 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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