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한 교양 있는 미국 여자와 골프를 함께 친 적이 있다. 나도 혼자 나갔고 그녀도 혼자여서 우리는 짝이 되었다. 함께 걸으면서 친하게 되어 명함을 교환하고 가끔 골프를 치자고 약속했다. 그녀는 인테리어 디자이너였고, 특히 골프코스 클럽 하우스와 주변 건물의 디자인이 그녀의 전문 분야였다. 그녀가 소속된 건축회사가 한국의 왕족이 개발한 골프장 주위의 콘도미니엄을 지었고 그녀는 그 내부 디자인을 했다고 내게 알려 주었다.
그녀는 그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몇 달을 한국에서 살았다. 그래서 한국의 로열패밀리와 여러 번 골프를 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날더러 그 왕족을 아는가, 고 물었다. 나는 한국은 민주공화국이고 이제 왕족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당신이 말하는 그 골프장에 관해서는 들은바 가 있고, 언젠가 그곳에 가면 당신 작품을 자세히 둘러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3년 전에, 정말 그 곳에 갔을 때 내가 둘러 본 것은 클럽하우스의 여자 화장실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 왕족의 높은 분이 먹기 위해서 기르고 있는 채소밭에서 무를 몰래 뽑아 먹었다. 함께 간 친구가 세포기를 뽑았는데 그 친구는 후에 그 높은 분께 고백했고 그 분은 미소만 짖더라는 후문을 들었다.
내가 왕족에 대해서 몰라도 한참 몰랐을 때 일이다. 왕조와 왕권은 없어졌어도 왕족의 후손들에게는 아직도 왕족의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나는 몰랐었다. 하기야 이승만 초대 대통령도 왕손 의식이 아주 강했다고 어디서 읽은 기억이 있다. 그분은, 태종의 맏아들로 국본인 세자였으나 왕위를 동생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던 양녕대군의 후손이라고 알려져 있다.
지난달 한국에 갔을 때, 나는 ‘필경재’라 이름 한 아름다운 한옥에서 좋은 분들과 좋은 시간을 가졌었다. 이번 한국 여행에서 얻은 경험 중에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일이다. 반드시 웃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자세를 지니고 살라, 는 뜻으로 건립 당시 이 가옥에 그런 호가 주어졌다고 한다.
15세기에 지어졌으니 500년의 역사를 숨쉬고 살아온 가옥이다. 그 당시 개인의 가옥으로는 최대 허용치였던 99칸짜리 집이다. 1987년 대한민국 전통건조물 제1호로 지정 받았다고 한다.
필경재는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의 증손인 이천수가 건립하여 지금까지 19대를 이어 그 종손들이 살아온 조선시대의 한옥이다. 이 가옥은 숙종 때 북한산성을 축조한 영의정 녹천, 이유를 비롯하여 몇 명의 정승과 도승지, 모두 15명의 과거에 급제한 종손들을 탄생시켰다.
북한산성을 쌓을 때 녹천의 가족들은 쌀과 노비와 생필품을 대어 공사를 도왔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녹천골’이 생겼고, 지하철 1호선 ‘녹천역’도 녹천의 호를 따서 지었다고 한다. 녹천의 후손들 중에서 한성판윤, 지금의 서울시장이 20명이나 배출 되었다고 한다.
이런 왕손의 역사가 담겨있는 전주 이씨의 종택이 서울 주변에는 필경재뿐이다. 가옥뿐 아니라 광수산 자락의 13만 평에 광평대군을 비롯한 700여기의 묘소도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궁중 요리를 전문으로 하고 손님을 왕손처럼 모시는 이곳을 특별한 날 한번쯤 찾아 즐겨 보는 맛, 그것은 곧 멋을 즐기는 일이기도 하겠다.
오랜만에 실내디자이너 친구와 만나 한국의 로열패밀리와 필경재에 관해서 얘기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친구에게 알려 줄 것이다. 조선 왕조에는 임금 외에도 왕위에 오르지 못한 125명의 대군과 군이 있었고, 그들의 후손들은 아직도 왕족이라는 자긍심을 지니고 살고 있다고.
송정원
전베벌리힐즈 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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