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초 뜻하지 않던 한국방문 계획이 잡혔다. 장마철과 폭염이라는,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기상예보를 가능한 한 담담하게 받아 넘기고 그곳에서 생겨날 좋은 일들만을 기대하며 비행기에 올랐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한 덕분인지 아님 이 악조건의 기후에도 고향을 찾은 이에 대한 인심 좋은 배려인지 뜻밖의 소득을 가득 안고 돌아올 수 있었다. 모든 일이 누군가가 미리 짜 맞추어 놓은 것처럼 척척 풀려나가는, 한마디로 운수 대통한 여행이었다.
기대하지 않던 ‘횡재’의 행렬은 강원도에서 충청도까지 가는 여행길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양양에서 행사를 마치고 대전까지 친구 차를 얻어 타고 가기로 되어 있었다. 목적지인 광주까지 가는 길에 잠깐 대전에 사는 선배한테 들렸다 가고픈 마음에 친구한테 부탁한 동행이었다.
그저 스쳐지나가는 것으로 여겼던 그 길이 고속도로 대신 국도를 택해준 친구의 배려 덕분에 진한 감동의 연속으로 돌변할 줄이야. 국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비포장도로의 먼지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인 듯싶었다. 창문을 활짝 열어 마음껏 맑디맑은 공기를 즐길 수가 있었다. 향긋한 공기와 함께 그 자락 마다 깊으면 깊은 대로 단아하면 단아한 대로 정감있게 다가오는 산세가 어느새 잊고 있던 향수로 변해가며 내 가슴 구석구석을 적셔가고 있었다. 아쉽고 또 아쉬워서 시종일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정말 아름다웠다.
그 뿐인가. 깊은 산중에서 우연한 전화 한통화로 갑작스레 만나게 된 대학 선배부부와의 해후 또한 훈훈하기 그지없었다. 봉평 근처 숲속 어느 아늑한 산장에서 여름 한 때를 즐기고 있던 선배는 얼굴을 봐야 겨우 기억이 날까 할 정도의 사이인데도 후배라는 이유 하나로 하루 저녁이라도 머물다 가라 성화였다. 하지만 우리는 가는 길이 바빠 서둘러 일어서야 했고, 마냥 섭섭한 선배는 눈에 띄는 대로 이것저것 죄다 집어주는 것이었다. 정말 귀빈이 된 기분이었다.
구비 구비 산길에 어린 감동들과 중간 목적지였던 대전에서 예정에 없던 하룻밤을 보내고, 하룻밤이 짧아 못내 아쉬웠던 같은 과 커플 선배 네와의 행복한 시간들을 안고 광주에 도착했다. 이번엔 돈 떼먹고 멀리 도망 못 간다는 말이 그대로 실감나는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혀 연결고리가 없을 것 같은 대학 남자동기랑 여고 동창생이 서로 사돈으로 얽혀 30년 만에 한 여고 동창과 연락이 된 것이다.
이 친구는 나를 만나자 마자 전화를 돌리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거의 동창회 수준으로 친구들을 소집하였다. 물론 그동안 본인들 역시 서로 소원했던 터에 나를 핑계로 뛰쳐나온 것이겠지만 이들이 날 기억해주고 만나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뿌듯했다. 몇년전 졸업 30주년 행사 때에는 사라진 내 행적을 찾느라 웹사이트가 한때 뜨거웠다며 모두들 죽은 사람이 살아온 양 반겨주었다.
이번 여행은 아무래도 산과 인연이 깊은 듯했다. 고교 동창들이 모여든 장소가 다름 아닌 무등산 자락에 자리한 한 동창의 전원주택이었던 것이다.
14년 전 여러가지 이유로 하는 수 없이 산속으로 찾아들었다는 이 친구네는 지금은 완전히 자리를 잡아 지인들까지 오가며 즐기는 휴식처가 되어 있었다. 야채밭, 나무와 꽃들, 그리고 개인집에서는 보기 드문 녹차밭에 둘러싸여 친구부부가 손수 제조하고 끓여낸 녹차의 향을 무등산 정기와 함께 음미하는 행운은 그다지 흔치 않으리라.
미국으로 돌아와 되새겨 볼수록 며칠간의 여정이 꿈처럼 아스라하기만 하다. 이 신기루 같은 기억 속에서 한가지 점점 더 확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지금까지 그저 막연하기만 하던 고향에 대한 느낌이었다. 언제 봐도 낯설지 않은 산천과 그리운 얼굴들이 항상 나를 엄마 품처럼 맞이해줄 준비가 되어있는 곳, 그래서 그 기억만으로도 가슴이 뻐근해지는 그 곳이 고향이라는 사실, 이제는 좀 더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여행이 내게 안겨준 고마운 선물이다.
김선윤
USC 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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