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에 ‘부자 몸조심’이란 것이 있다. 바둑이 유리한 쪽은 가능한 한 위험이 있는 수를 피하고 안전 위주로 가야 한다. 어차피 한 집만 이겨도 되는데 크게 이기려고 굳이 모험을 했다 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불리한 쪽은 어떻게 든 트집을 잡아 승부처를 만들기 위해 온갖 기수를 던져온다. 정수대로 또박또박 두다가는 결과가 어떻게 될 지가 너무나 분명해서다. 누가 어떤 수를 두느냐만 봐도 바둑이 누구 쪽으로 흘러가는가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존 매케인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예상을 깨고 새라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를 러닝메이트로 선택했다. 부패한 알래스카 공화당의 실력자들에 도전, 이긴 패기를 샀고 낙태 반대, 총기 소유지지 등 당내 기독교 보수 우파의 지지를 얻기 위한 고육책이란 분석이다.
그러나 약점도 많다. 우선 나이가 44세로 지난 금요일 72세가 된 매케인의 딸 뻘이다. 예선 내내 매케인은 버락 오바마의 경험 부족을 공격해왔는데 불과 2년 전까지 인구 7,000 시골 마을 시장을 지낸 경력이 전부인 페일린은 경력으로 따지면 오바마에도 못 미친다. 고령의 매케인 유고시 페일린이 과연 백악관에 앉아 세계의 악당들을 상대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아무리 공화당 지지자라 하더라도 한 줄기 불안이 스칠 것이다.
페일린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한지 불과 며칠 안 돼 충분히 검증을 거치지 않았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고등학생 딸이 임신 5개월인 것도 그렇고 개혁 이미지와는 달리 와실라 시장으로 있을 때 연방 정부에 로비를 해 수천만 달러를 자금을 따온 일, 남편이 20여년전 음주 운전으로 체포된 경력이 있다는 사실까지 드러났다. 90년대에는 알래스카의 독립을 주장하는 알래스카 독립당원이기도 했다.
워낙 ‘깜짝쇼’에 신경을 쓰다 보니 매케인 측근은 물론이고 페일린 측근들조차 페일린이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리라는 사실을 발표 직전까지 거의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매케인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친구이자 생각이 비슷한 조 리버먼과 탐 리지 등을 놓고 고심했으나 기독교 우파의 반발이 워낙 거세 결 국 페일린을 낙점한 것으로 알려졌다.
리버먼이나 리지 같이 경험이 풍부하고 대통령 감이란 평을 듣는 인물을 놔두고 왜 매케인은 무명 인사나 다름없는 페일린을 택했을까. 워싱턴 인사이더를 가지고는 변화를 바라는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민주당이 사상 최초의 흑인 후보를 내놓은 마당에 이에 상응하는 역사적 결단을 내리지 않고는 승산이 없다고 봤을 것이다.
엇비슷하게 나오는 여론 조사에도 불구하고 공화당이 내심 얼마나 초조해 하고 있는가는 허리케인 구스타브가 온다는 이유로 부시와 체니를 모두 전당대회장에 오지 못하게 한데서도 알 수 있다. 공화당 전당대회 첫날이 구스타브 피해자 구호 기금모금 행사장처럼 된 것도 공화당이 아직까지 카트리나 악몽에 시달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3년 전 허리케인 카트리나 늑장 대응으로 인기가 추락한 부시가 피해 지역을 놔두고 파티를 즐길 수 없다는 점은 이해가 가지만 현직 정부통령이 명색이 차기 대통령 후보를 뽑는 전당대회장에 오지 않은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도 전과 같이 몇 개의 경합 주에서 승부가 갈릴 것이다.
가주를 비롯한 서해안 주, 뉴욕과 뉴잉글랜드, 일리노이는 민주당, 중서부와 북부, 남부 시골 주들은 공화당을 찍을 것이고 펜실베니아, 미시건, 오하이오, 플로리다 등 일부 주들이 사실상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다. 2000년 대선에서 부시는 플로리다의 검표기 덕에, 2004년 선거에서는 오하이오 기독교 우파의 몰표로 신승했다. 올해 선거에서는 둘 다 매케인에 큰 도움을 줄 것 같지 않다.
매케인은 불경기와 부패, 긴 전쟁에 지친 공화당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한 승부수로 페일린을 던졌다. 과연 약효가 먹힐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현재까지는 성급한 결정이라는 분석이 다수인 것 같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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