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뭥미가 뭐임니까’?
한국을 건너방 드나들듯 자주 왕래하는 신호범 워싱턴주 상원의원은 학생들에게 강연할 때 “여러분을 만나 기쁩니다” 따위의 고식적인 인사를 하지 않는다. 그냥, 오른 팔을 치켜들고 “방가, 방가”라고 외친다. 그래야 환호와 박수를 더 많이 받기 때문이다.
정치감각이 둔한 필자는 신의원보다 훨씬 젊지만(?) 세태에 적응하는 능력이 신의원에 족탈불급이다. 얼마 전 시애틀 한인등산회의 인터넷 카페에 가입신고를 했을 때 회원들로부터 ‘방가, 방가’라는 환영인사 댓글을 받고서야 그게 ‘반갑다’는 뜻임을 알았다.
인터넷 채팅에 쓰이는 글들을 보면 필자가 갑자기 팍 늙어버린 느낌이다. 분명히 한글인데 도대체 뜻을 모르겠다. ‘갈 수 없어 와방 안습니다’ 따위이다. ‘와방’은 ‘매우’라는 뜻이고 ‘안습’은 ‘눈에 습기가 찬다’(눈물이 난다)는 의미란다. 빨리 타자하려다 오타가 난 글자가 채팅에선 당당한 신조어로 대접 받는다. ‘오나전’(완전), ‘젭라’(제발), ‘뭥미’(뭐임)가 그런 예이다. 줄인 말도 있다. ‘지못미’는 ‘지켜주지 못해 미안’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 폭발적으로 양산되는 신조어 중 일부는 언젠가 표준어로 뿌리를 내려 한글의 부족한 어휘를 늘려줄 수도 있다. 필자는 품위 없는 신조어 남발이나 ‘뭐임니까’처럼 발음 나는 대로 써 갈기는 작태가 ‘와방’ 못 마땅하지만, 어떤 면에선 한글의 다양성을 높여준다고 볼 수도 있다. 영어나 한자어를 ‘오나전’ 차용하는 것보다는 바람직하다.
우리 한인들이 걱정할 건 따로 있다. 2세들의 한글교육이다. 80년대 초까지도 많은 부모들이 집에서 자녀들과 ‘콩글리시’로 대화했다. 한국말을 쓰면 어린 아이들이 영어를 빨리 익히지 못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런 자녀들이 장성해서는 대부분 ‘안습’이다. 요즘 미국에선 영어를 잘해서 얻는 기회보다 한국말을 못해서 잃는 기회가 더 많기 때문이다.
필자는 대학을 졸업한 자녀를 신문사에 취직시켜 달라고 부탁하는 부모를 가끔 만난다. 인턴을 원하는 고교생도 종종 찾아온다. 대부분 총명하고 발랄해서 욕심나지만 채용할 수 없다. 영어는 청산유수인데 (한글신문에서 일하고 싶다는 사람이) 한글을 모르기 때문이다. 남이 하는 한국말은 대강 알아듣지만 자기는 한국말을 반벙어리처럼 더듬거린다.
1세들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민 온 뒤 남의 글인 ABC를 배우려고 고생하는 사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한글을 잊어버리고 있다. 이민경력이 길수록 영어도 완벽하지 못하고 한글 맞춤법과 외래어 표기법도 오락가락한다. 작년 이맘때 본란에 ‘Federal Way’는 ‘페더럴웨이’로 표기해야 맞다고 썼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여전히 ‘훼드럴웨이’를 고집한다.
오는 9일은 562주년 한글날이다. 고작 24자(닿소리 14자, 홀소리 10자)인 한글은 26자인 세계공통의 알파벳을 비롯한 어느 나라 글자보다도 훨씬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글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유네스코가 인류의 기록문화 유산으로 지정한 유일한 글자이다.
이처럼 자랑스러운 글자를 기리는 한글날이 ‘넘’(너무) 홀대를 받는다. 국경일이지만 공휴일이 아니라서 달력에 표시조차 없다. 한국정부는 공휴일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1991년 한글날을 국군의 날(10월1일)과 함께 공휴일에서 제외했다. 그 중간에 있는 개천절(3일)은 여전히 공휴일이다. 필자는 개천절보다 한글날의 가치가 100배는 크다고 생각한다.
자고로 고유의 말을 지키지 못한 민족은 지상에서 사라졌다. 미국의 인디언 원주민들이 지금 그 과정을 밟고 있다. 고유 언어를 자자손손 전할 수 있게 해주는 가장 좋은 수단이 바로 고유 글자이다. 자녀들에게 한글을 완벽하게 가르칠 수 있다고 자신하는 부모가 한인사회에 과연 얼마나 될는지, 한글날을 앞두고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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