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다니던 때 숙제는 언제나 부담스러운 것, 해야 하는데 마지막까지 미루고 싶은 것이었다. 긴 방학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기 전날 밀린 일기며 숙제를 늘어놓고 밤늦도록 허둥대던 기억들이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나는 전혀 새로운 숙제를 하고 있다. 약간 부담은 되지만 설렘이 더 앞서는 숙제를 하고 있다. 올 가을학기부터 근처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듣기 시작한 그림과목의 숙제가 그것이다. 전혀 다른 분야로 공부를 하고 직장을 다니며 시간을 보내다가 운 좋게 짬이 난 지금, 나는 뽀얀 얼굴의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이들과 같은 스튜디오에 앉아 나보다 늦게 대학을 졸업한 강사의 강의를 듣고 있다.
처음엔 아줌마의 나이로 새로운 공부를 한다는 게 좀 쑥스러웠다. 어린 아이들과 한 강의실에 앉아 똑같이 종이를 펴고 연필을 꺼내는 게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첫날 교실에서 보니,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머리 하얀 할아버지가 계시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짐작컨대 연상으로 보이는 아줌마도 두 명이나 더 있었다. 게다가 나처럼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은 아주 적극적으로 질문하는 등 내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
그러자 용기가 생겼다. ‘30 노인 60 청년’이라는 말처럼 인생을 사는 것은 결국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내가 안 되겠다, 못 하겠다 생각하면 안 되는 일이고, 내가 하겠다, 이루겠다고 생각하면 된다는 것을. 그리고부터 숙제를 대하는 태도도 바뀌었다. 한 가지를 받으면 두 가지를 했다. 내가 이만큼 늦었으니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에 단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내가 뒤늦게 학교생활을 시작함과 동시에 아이도 킨더가튼을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매일 숙제를 받아온다. 아직은 대단치 않은 것들이지만 5세 아이에게는 부담이 될 만한 내용들이다. 옆에서 봐주지 않으면 딴 짓을 하기 일쑤이고, 막히는 부분에서는 도와달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다가 그만두거나 못하겠다고 하지는 않는다. 내가 숙제를 해야 하는 학생 입장이 된 덕인지 ‘엄마도 숙제를 한다’는 사실이 아이에게는 무언의 가르침이 된 것 같다. 아이를 키우는 영광스런 숙제의 별책부록 같은 일이다.
사실 그 어떤 숙제보다 멋지지만 어려운 숙제는 부모가 되는 일일 것이다. 오죽하면 잘 아는 선배는 절대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선언까지 했을까. 자신이 걸어온 엉뚱하고 실수투성이 길을 아이가 똑같이 걷지 않길 바라는 마음의 발로일 것이다.
나 또한 내가 했던 실수들을 제발 아이가 하지 않길 바라지만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런 실수를 했기 때문에 나는 인생의 다른 면을 볼 수 있었고 숙제를 제대로 하는 법을 배웠고, 이제는 숙제를 즐기는 법까지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모두 숙제를 안고 있다. 학생은 공부를, 직장인은 열심히 일할 숙제를, 비즈니스 오너들은 잘 꾸려서 직원들을 지켜야할 숙제를, 주부들은 가정을 잘 돌보는 숙제를… 그 숙제를 등한시하고 귀찮아 할 때 문제들이 터지기 마련이다.
인간관계에서의 숙제도 있다. 상대방의 마음을 배려하고 이해하고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공동의 숙제이다. 부부 사이, 친구 사이, 이웃 사이, 연예인과 관객 사이… 어디서나 사람을 대하는 마음의 자세를 생각하면 어렵지 않은 일이다. 국민배우 최진실이 세상을 떠난 후 그녀를 좀 더 이해하고 감싸주지 못했던 마음들이 지금 무척이나 무겁다.
사람을 대하는 자세, 세상을 대하는 자세를 조금만 더 긍정적으로 한다면 마음의 숙제를 한결 기분 좋게 해결해 나갈 수 있을 텐데. 최진실도 그렇게 혼자서만 외롭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그녀의 죽음 앞에 우리는 또 마음의 숙제를 지게 된 기분이다. 사람을 대하는 마음의 자세를 다시 한번 돌아봐야 할 것 같다.
유정민
카피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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