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중반에 한국을 떠났다. 서울 사대문 안, 하고도 한 복판인 당주동에서 태어나 내내 서울에 살았던 나는 젊음에 치어 내가 살던 땅은 미처 몰랐던 것 같다. 두어 번 한국엘 다녀 온 적은 있어도 사람들이나 몇, 만나고 허위허위 떠났었다. 이번엔 오랜만에 아무 볼일도 딱히 없이 내키는 대로 다녀보자, 하고 나섰다. 세월은 논두렁 모퉁이의 한포기 풀잎에도 서려 있는 듯 했다.
마침 오곡이 무르익는 가을이어서 산이 물러앉는 손바닥만한 땅에도 구불구불 막아 논을 만들어 심어놓은 벼들이 황금빛으로 나락을 느리며 서있는 모습이 눈 부셨다. 옛날, 농부들이 처자식의 입속으로 들어갈 양식을 생각하며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의 표현이 저절로 생각난다. 올해는 큰 장마도 없었고 볕은 뜨거워 모든 작물이 풍작이란다. 예전엔 많은 땅이 척박하게 등뼈를 들어내고 있던 듯 했는데 나무를 해 방을 데우고 밥을 해먹지 않은지 오래라 농지와 길을 빼곤 어디든지 잡목이 우거져 나라전체가 파랗다. 선산을 가는 길도 온갖 나무와 풀이 가득해 마치 밀림을 헤치며 가는 기분이다. 가는 곳마다 밤나무가 지천이고 길가에 떨어진 아람이 벌어진 밤송이에는 아기의 주먹만 한 밤이 빼곡하게 등비비고 있다. 그리고 소나무... 여릿여릿한 등걸이 구불구불하게 올라가 가지마다 줄기마다 한웅큼의 잎새를 얹고 서 있는 한국 소나무의 모습은, 비록 lumber로 쓰일 수는 없게 앙상하기는 하지만 자태만은 애잔하게 어여쁘다.
전주의 한옥마을은 이제 관광명소로 손색이 없다. 아름답고 깨끗한 한옥들이 외씨버선 같은 추녀를 살짝 올려들고 나지막한 담장을 나누며 모여 섰고, 곳곳에 기와 얹은 정자며 원두막이 지나가는 행인을 부르며 쉬엄쉬엄 살자고 속삭이는듯하다. 전주에 갔다가 광주엘 들러 담양으로 향했다. 대나무로 유명한 담양은 단아하면서 고운 동네다. 대나무가 밀림을 이루고 대숲사이로 설레는 바람소리. 작은 개울이 작은 바위들을 따라 돌돌거리며 흐르는 소리. 그리고 낙향한 선비들이 모여 함께 시를 즐기며 학문을 나누었다는 소쇄원은 규모는 작지만 돌과 물과 기와 올린 옛 정자들의 풍광이 그윽하면서도 수려하다.
섬진강을 따라 하동으로 옮기는데 코스모스 축제라 하여 넓고 넓은 초지가 온통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로 가득하고 그 주위에 한복을 입고 강강수월래를 하는 인형들을 세워놓은 것이 흥겨웠다. 하동에 닿자 지리산의 이병주 선생님이, 그리고 섬진강이 배경이 되었던 토지가 생각난다. 박경리 선생님은 어쩜 그렇게 보지 못해도 눈에 선하도록 그 마을을 서술했을까? 최참판댁의 마름이 마님의 심부름을 갔다가 나룻배를 타고 건너와 타달타달 걸어오는 모습도 보이고 장날, 장에 오가는 용이, 칠성이, 봉기의 모습도 보인다. 남의 눈을 피해 밤에 몰래 마을에 들어와 어미가 살던 오두막에서 조용히 흐느끼는 월선의 등판도 보이고 기화가 몸 던진, 반짝이는 섬진강, 강물의 물비듬도 보인다. 토지문학관 옆에는 티브이 드라마의 세트를 그대로 놓아두어 찾아오는 이들에게 보여주는데 자잘한 세간이 없어서 그렇지 정말 실제의 삶을 박제해 놓은 것 같다. 진주와 통영을 거쳐 서울로 돌아오는데 참 한국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저절로 난다.
서울은 서울대로 많은 녹지대가 곳곳에 있어 마음을 다독여주고, 한강을 따라 긴 산책로와 공원은 지나가며 보기만 해도 아름다웠는데 밤에 나간 청계천에서 금나라의 지휘로 두 시간이나 되는, 귀에 익은 아름다운 선율의 메들리콘서트를 만남은 생각지도 않던 환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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